항목 ID | GC029003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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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開山浦大捷 |
영어의미역 | Gaesanpo Victory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호동 |
[정의]
1592년 고령 개산포에서 김면이 이끈 의병이 왜적을 물리친 전투.
[개설]
개산포대첩은 의병장 송암(松菴) 김면(金沔)이 노고산성(老姑山城)과 무계리산성(茂溪里山城)에 의병을 집결시켜 왜군의 낙동강 운행에 일대 타격을 가한 전투이다. 개산포는 김면이 살았던 지금의 고령군 개진면 양전리에서 낙동강 쪽으로 불과 6~7㎞밖에 되지 않는 거리이면서 현풍의 도동 쪽에서 고령으로 바로 건너오는 길목에 있는데, 20여m나 되는 절벽 아래이며 물이 깊고 홍수가 나도 범람하지 않는 지역이다. 노고산성은 대장산성(大丈山城)이라고도 하며 의병이 축조하였다고 하여 의병성지라고도 한다. 고령군 우곡면 도진리 동쪽 대장산[302m]에 낙동강 안쪽과 접하는 급경사 능선의 정상 봉우리에 축조된 산성이다.
무계리산성은 성산면과 다산면, 대구광역시 달성군 논공읍 일대, 그리고 낙동강의 수로 및 대구~고령 간 육로를 조망할 수 있는 지형적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다. 1592년(선조 25) 5월 9일부터 이듬해 1월 15일까지 약 8개월 간 밀고 밀리는 싸움의 와중에 개령에 주둔하고 있던 왜적과 낙동강 강변에 잠복하고 있던 김면의 의병 사이에 세 차례에 걸친 격전이 벌어졌을 때 의병이 집결하였던 산성이기도 하다.
[발단]
임진왜란 때 경상도 지역으로 진출한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가 이끄는 왜적은 영산-창녕-현풍-무계-성주를 잇는 낙동강 수운 확보 계획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개령현에 주둔하면서, 5월 19일에 부장인 무라카미 가게치카[村上景親]로 하여금 무계를 지키게 하였다. 고령에서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 김면은 이때 거창에 머물고 있다가 고령이 위험에 직면하자 6월 6~7일경 군사를 이끌고 고령으로 들어와 9일과 10일에 개산포에서 왜적과 전투를 벌였다.
[경과]
김면은 적군의 침략에 대비하여 개산포 지리에 밝은 박정완(朴廷琬)에게 물속 깊이 수많은 말뚝을 치게 하였고, 문위 등에게는 화공(火攻)에 필요한 화구(火具)와 돌을 준비하도록 하였다. 또한 곽준에게는 강변에 복병을 풀어 물에서 육지로 올라오는 왜병들을 공격하도록 지시하였다.
김면은 6월 9일 묘시(卯時)[오전 5~7시]에 적이 현풍의 쌍산강에서 배를 타고 내려오자 군관인 만호 황응남(黃應男)에게 정병(正兵) 30여 명을 거느리고 요해처에 매복해 있다가 내려오는 왜선 1척을 급습하게 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당시 왜선에는 적병 80여 명과 조선인 여성 대여섯 명이 타고 있었다.
[결과]
적을 거의 전멸시킬 즈음 또 다른 왜선이 도착하여 중과부적으로 완승을 거두지는 못하였다. 이튿날에 또다시 왜적 3급과 적선 1척을 획득하였는데, 여기에는 보화가 가득하였다. 김면은 이들 보화를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에게 보내어 행재소(行在所)에 전하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