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003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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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倭物庫 |
영어음역 | Waemulgo |
영어의미역 | Warehouse of Japanese Articl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다산면 호촌2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호동 |
[정의]
1472년 경상북도 고령 지역에 관청과 민간에서 사용하는 일본 상품을 보관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창고.
[설치 경위 및 목적]
조선시대의 대일 관계는 1년 3사(使)의 정기 사행이 규정되었던 중국과 달리 교린(交隣) 체제에서 비정기적인 사행이 오갔고, 무역도 회사(回賜)·답례(答禮)·하사(下賜)를 바탕으로 하는 공무역과 사행의 왕래에 부수하여 허용된 사무역 외에는 민간 차원의 사무역을 일체 금지하였다. 공무역만 허용하는 대일 통교 정책으로 부산의 왜관과 서울을 오가는 막대한 물량을 보관할 장소가 필요해지자 부산과 서울 간의 교통 요충지인 지금의 고령군 다산면 호촌리 사문동 남쪽 낙동강 나루인 사문진(沙門津)에 1472년(성종 3년) 6월 왜물고를 설치하였다.
[변천]
사문진에 왜물고가 설치되면서 삼포에 들어온 일본 상품은 모두 국비로 매입되어 나룻배로 옮겨 싣고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7~8일 만에 사문진에 도착하여 왜물고에 보관하였다. 보관된 물품 일부는 서울의 왕실 관아에 보내고 나머지는 국내 상인들에게 매매하였다.
그러나 왜물고에 넣을 때 조금이라도 전량(錢兩)이 부족하면 수량에 맞추어 추징(追徵)하기 때문에 영수하여 받는 관원이 그 고통을 감당하지 못하거나, 인마(人馬)를 뽑아서 정하여 짐을 실어 수송하게 하여 농민에게 피해를 주었다. 또 거액의 관비로 사들인 물품이 산더미처럼 쌓인 채 소실되거나 썩는 등의 폐해가 많아서 결국 사무역이 부활하였다. 사무역이 부활하여 삼포에서 직거래가 성행함에 따라 사문진의 왜물고는 그 기능을 점차 상실하여 폐쇄되기에 이르렀고 사문진도 쇠락하였다.
[현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