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003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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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麗時代 |
영어의미역 | Goryeo Period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
시대 | 고려/고려 |
집필자 | 김호동 |
[정의]
918년에서 1392년까지 고려왕조가 지속되었던 시기의 고령 지역 역사.
[개설]
통일신라시대 고령군은 야로현과 신복현을 영현으로 갖고 있었다. 그러나 후삼국 시기 고령 지역에는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뚜렷한 호족이 없는 반면 인근의 성주 지역에서는 이총언(李悤言) 등이 고려 태조 왕건에 귀부하여 후삼국 통일에 기여하였다. 그 결과 성주 지역은 940년(태조 23) 주부군현의 명호 개정 때 경산부(京山府)가 되어 1개의 속군과 14개의 속현을 거느리는 대읍이 되었다.
[지방 행정 체계 변천]
940년 주부군현제의 명호 개정에서부터 시작된 고려의 지방 행정 체계는 1018년(현종 9)에 제도적 완성을 보았다. 고려의 지방 행정 체계는 주-속읍 체제를 특징으로 하고 있어, 수령이 파견된 주읍은 지방 행정 체계의 중심에 있었지만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속군과 현은 주읍의 수령으로부터 지배를 받는 행정 체계를 갖고 있었다.
고려시대 고령은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속읍으로서 경산부[성주]의 관할 하에 있었다. 고령 지역은 『고려사(高麗史)』 지리지에는 ‘고려 초’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940년에 단행된 주부군현의 명호 개정 때 ‘군(郡)’이란 호칭은 그대로 지녔지만 경산부의 속군이 되어 경산부의 간접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때 야로현과 신복현은 현으로서의 단위를 잃어버리고 고령에 합속되었다.
고려의 지방 행정 체계가 완성되는 1018년 고령은 속읍으로서의 직할 영역이 축소되는 변화를 겪게 되었다. 현종의 어머니 효숙왕후(孝肅王后)의 고향인 합주를 지합주사로 승격시키고 인근의 읍 12개를 속읍으로 만들었는데, 이때 고령의 직할 영역이었던 야로현이 현으로 부활되어 합주에 이속되었다. 그 결과 야로현은 지금까지 합천 지역의 관내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동안 수령이 파견되지 않았던 고령군은 1175년(명종 5) 감무가 파견됨으로써 경산부의 관할에서 벗어나 독립된 읍으로서의 위상을 갖게 되었다.
[재지 세력의 존재 양태]
경산부의 속읍이었던 고령군은 각종 행정 업무를 경산부의 지경산부사가 관할하고 있었지만 고령의 토착 세력인 향리 집단이 읍사(邑司)를 구성하여 고령군 내부의 조세 수취 등의 행정 업무를 처리하였다. 고령군을 실질적으로 직접 통치하는 향리집단을 구성했던 토성(土姓)은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誌)』·『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신(申)·박(朴)·이(李)·유(兪)·김(金)·백(白)·정(鄭) 등이다. 이들 토성은 고령 지역의 지방 행정을 장악하면서 징세 조역을 담당했던 향리 집단의 상층부인 호장층으로서 고령을 실질적으로 장악했던 지방 세력이었다.
[역사적 사건]
고려시대 중기까지 속읍 지역으로 존재했던 고령 지역에 감무가 파견된 것은 1175년이었지만 군세를 거의 떨치지 못했기에 역사의 무대에서 드러난 적은 거의 없다. 다만 무신 정권 시대 미숭산의 반룡사에서 화엄 결사가 있었고, 충렬왕 즉위년인 1274년 원 황제의 지시를 받아 행중서성(行中書省)에서 고려에 보낸 공문, 즉 일본 동정으로 인해 사원을 짓밟는 행위를 하지 말 것을 당부하는 방문을 반룡사에 게시해 놓았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리고 우왕 대에 경상도도순문사 박위(朴威)가 고령 지역에서 왜군을 치고 35명을 베었다는 기사와 함께 1381년(우왕 7) “고령군에서 기근이 심하여 길에 버린 아이가 많았으며 굶어 죽은 사람이 부지기수이다.”란 기록을 통해 고려 후기 고령 지역이 왜적과 기근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