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003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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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加尸兮縣 |
영어음역 | Gasihye-Hyeon |
이칭/별칭 | 가시혜성,신복현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
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우곡면 도진리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류영철 |
[정의]
685년부터 757년까지 경상북도 고령 지역에 설치되었던 행정구역.
[제정경위 및 목적]
신라 진흥왕은 562년(진흥왕 23) 대가야를 멸망시킨 뒤 나라 이름을 그대로 군의 명칭으로 삼아 대가야군으로 편제하고, 예하에 적화촌[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야로면·가야면 일원, 고령군 쌍림면 일부]과 가시혜성(加尸兮城)[지금의 경상북도 고령군 우곡면·개진면 일원]을 두었다. 대가야의 직접 지배 영역이었던 오늘날 고령군 성산면 일원과 합천군 봉산면 지역은 대가야군에서 분리하여 각각 일리군(一利郡)과 대야주(大耶州) 또는 대야군의 영역으로 편제하였다. 이는 대가야군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조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관련기록]
가시혜현(加尸兮縣)의 지명 변천 과정을 알 수 있는 기본적인 자료는 『삼국사기(三國史記)』「지리지(地理志)」 강주 고령군조이며, 이후 편찬된 『고려사(高麗史)』「지리지(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비롯한 각종 지리지나 읍지 등의 자료는 대부분 『삼국사기』「지리지」를 따르고 있다. 가시혜현의 위치와 관련하여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대동지지(大東地志)』가 내용을 달리한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고령군 …… 영현이 둘인데 …… 신복현(新復縣)은 본래 가시혜현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어디인지 알 수 없다.”라고 하였다. 즉 가시혜현은 경덕왕 때 신복현으로 개칭하였으나 『삼국사기』를 편찬하던 고려 중기에는 그 위치를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삼국사기』「열전」 김유신조에는 644년(선덕왕 13)에 가혜성(加兮城)과 가혜진(加兮津)이라는 지명이 나오고, 『삼국사기』「신라본기」 태종무열왕 8년조에는 661년경(문무왕 1) 신라 군대가 가시혜진(加尸兮津)에 이르렀다는 기사가 나온다. 이를 통해 가시혜현은 가혜성으로 불렸고 가혜진 또는 가시혜진이 있었으며, 신라가 낙동강을 건너 서쪽으로 진출하는 경로에 자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고령군 고적조에는 “신복현은 김부식(金富軾)이 말하기를 본래 가시혜현으로 고령군의 영현이었는데, 경덕왕 때 이름을 고쳤다고 하나 지금은 자세하지 않다.”라고 기록하고, 다시 “생각하건대 현의 서쪽 10리 되는 곳에 지명이 가서곡(加西谷)이라는 곳이 있는데, 시혜(尸兮)가 변하여 서(西)로 되었는지 의심스럽다.”라고 기록하였다. 즉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신복현에 대해 『삼국사기』「지리지」의 기록을 인용하고 나서, 고령현의 서쪽 10리 되는 곳에 있는 가서곡이 신복현의 옛 땅일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한편,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는 『대동지지』에서 “신복은 현의 남쪽 30리에 있다. 본래 신라 가시혜였는데, 일명 가시성(加尸城)이라고도 한다. 경덕왕 16년에 신복이라 고쳐 고령의 영현으로 되었다가 고려 초에 고령의 속현이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현의 서쪽 10리에 가서곡이란 곳이 있는데 이것이 아닌가 의심스럽다.”라고도 하였다.
김정호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제시한 ‘신복현=가서곡’이라는 내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현의 남쪽 30리 지점에 가시혜현[또는 가시성]을 비정하였다. 더불어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서는 고령의 남쪽 회천 변, 오늘날의 우곡면 일대로 비정하였다. 즉 김정호는 ‘신복현=우곡면’임을 주장한 것이다. 더불어 가시혜현은 가시성으로 불리기도 했음을 알려 주고 있다.
이상에서처럼 가시혜현의 위치를 『삼국사기』에서는 알 수 없다 하였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가서곡으로, 『대동지지』와 『대동여지도』에서는 우곡면 지역으로 비정하였다. 이에 대해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내용에 따라 가서곡을 쌍림면 고곡리 일대로 비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주장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가시혜현이 낙동강 변에 있는 교통의 요지였다는 사실과는 부합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 위치는 현재의 우곡면 도진리 일대로 비정한 김정호의 견해가 더욱 타당해 보인다. 또 가혜진은 오늘날 개진면 개포리의 개경포(開經浦)로 추정된다. 요컨대 ‘가시혜현=가시성=우곡면 도진리, 개진면 일대’로 정리된다.
[변천]
신라시대 가시혜현 지역인 오늘날 우곡면과 개진면에 언제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양전리 고인돌군, 직리 고인돌군, 개포리 고인돌, 고령 장기리 암각화, 우곡면 사촌리 고인돌군, 도진리 바위구멍 유적 등을 통해 청동기시대부터는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삼한시대에는 오늘날 개진면 양전리·반운리 일대를 중심으로 변한(弁韓)의 소국이었던 반로국(半路國)이 있었고, 이때부터 우곡면 지역이 반로국의 영역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4세기 이후 고령 지역의 정치 주체는 중심지를 지금의 대가야읍으로 옮기면서 대가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개진면과 우곡면 지역은 여전히 중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오늘날 개진면 개포리의 개경포는 대가야읍에서 외부로 통하는 중요한 포구였으며, 낙동강과 회천이 합류하는 우곡면 일대 역시 교통의 요지였다. 따라서 이 지역은 대가야가 외부로 진출하거나 외부 세력이 대가야로 들어오는 교통·군사 요충지에 해당하였다. 그 때문에 낙동강과 회천 방면을 방어하기 위해 우곡면 대곡리의 소학산성, 우곡면 도진리의 도진리산성, 대가야읍 내곡리의 내곡리산성 등이 축조되었다. 특히 이 중에서도 도진리산성이 가장 중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우곡면 도진리 뒷산에 있는 도진리산성 남쪽과 북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에는 도진리 고분군이 있어, 도진리산성과 도진리 고분군 간에 관계가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도진리 고분군 발굴 조사 결과 모두 2기의 수혈식 석곽묘가 조사되었는데 개배(蓋杯), 개(蓋), 장경호(長頸壺) 등 대가야의 전형적인 토기가 출토되었다. 조성 시기는 5세기 말에서 6세기 전반으로 추정되며 대가야 중·하위 집단의 무덤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현재의 도진리산성은 『삼국사기』에 보이는 가혜성 또는 가시혜성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삼국사기』에는 644년 처음으로 가혜성이 등장하지만 대가야시대부터 산성이 축조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또 『삼국사기』에 따르면 644년과 661년에 신라가 백제와 전쟁을 치르면서 경주에서 서쪽으로 진격하는 과정에서 각각 가혜성과 함께 가혜진 또는 가시혜진이라는 지명이 등장한다. 특히, 신라군이 낙동강을 건널 때 가혜진을 이용하였으므로 이곳은 낙동강을 건너기 위한 나루가 설치된 군사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가혜진 또는 가시혜진은 현재 개진면 개포리의 개경포로 추정되며, 조선시대에는 개산강(開山江) 또는 개산포(開山浦)로 불렸다. 따라서 현재의 개경포는 대가야시대에는 가혜진으로 불리던 낙동강 변의 주요 포구였으며 그 후 개경포, 개산강 등으로 명칭이 바뀌었던 듯하다. 현재 개경포가 있는 개진면 개포리 뒷산에는 개포리 고분군이 있다. 개포리 고분군은 정식으로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이곳에서 출토된 대가야 양식의 금제 귀걸이가 매장문화재로 신고되었다. 따라서 개포리 고분군은 대가야시대 가혜진을 운영하던 집단이 조성한 고분으로 여겨진다.
이상에서처럼 『삼국사기』에서 7세기 중반경의 기록에서 보이는 가혜성은 우곡면 도진리의 도진리산성, 가혜진 또는 가시혜진은 개진면 개포리의 개경포로 정리된다. 또 가혜성과 가혜진은 대가야시대부터 축조되거나 개설되어 운영되었다. 다만 대가야시대의 명칭이 무엇이었는지는 잘 알 수 없는 형편이다. 그런데 신라가 대가야를 정복하고 나라 이름을 그대로 군명으로 삼아 대가야군으로 한 것에서 가시혜성과 가혜진도 그 이전인 대가야시대부터 사용되었던 지명이며, 가시혜성의 중심지는 오늘날 우곡면 도진리 일대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562년 신라 진흥왕은 대가야를 멸망시킨 뒤 대가야의 왕도를 중심으로 멸망한 ‘대가야’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여 대가야군을 설치하고 예하에 적화촌과 가시혜성을 두었다. 아마도 가시혜성에는 행정 관사가 들어서고 지방관으로 도사(道使)가 파견되었을 것이다. 이 시기 대가야군의 상급 행정구역은 하주(下州)였다. 이로써 가시혜성-대가야군-하주로 이어지는 지방 행정 체계가 구축되었다.
이후 가시혜성은 신라와 백제의 전쟁이 격심한 642년에서 644년까지 2년 남짓 백제의 영역에 포함되었으나 644년 김유신(金庾信)의 활약으로 다시 신라의 판도로 귀속되었다. 이로 미루어 가시혜성은 백제와 신라의 통일 전쟁 과정에서 중요한 군사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685년(신문왕 5) 신라의 9주 5소경 체제가 정착되면서 전국에 걸쳐 성(城)·촌(村)을 현(縣)으로 개편하는 현제(縣制)를 시행하여 대가야군에 속하였던 적화촌과 가시혜성은 각각 적화현과 가시혜현으로 개칭되었다. 이때 가시혜현에는 현령이 파견되었으리라 여겨진다. 그리고 지방관 아래에는 읍사(邑司)가 구성되어 가시혜현의 재지 유력자가 촌주(村主)로 임명되어 현령의 통치 업무를 보좌하였다. 대가야군의 상위 행정구역도 하주에서 665년(문무왕 5) 거열주(居列州)[지금의 경상남도 거창 지역]로 바뀌었다가 685년(신문왕 5) 청주(菁州)[지금의 경상남도 진주 지역]로 바뀌었다.
757년(경덕왕 16) 경덕왕이 왕권과 중앙 집권 체제 강화를 위해 전국적인 군현 지명을 세련된 한문식으로 고치어 대가야군은 고령군, 가시혜현은 신복현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940년(태조 23) 신복현의 상급 행정구역인 고령군이 경산부(京山府)의 속현이 되면서 신복현이 폐지되고 신복현 지역은 고령군의 직할 영역이 되었다.
[현황]
신라시대 대가야군에 속했던 가시혜현은 통일신라시대 신복현이 되었다가 고려 초인 940년경 폐지되어 고려 중기에는 위치가 어디인지조차 분명히 알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그 후에도 조선시대를 거쳐 근대에 이르기까지 낙동강 변의 나루터인 가혜진[개경포]은 계속 중시되어, 오늘날 ‘개진’으로 계승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