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003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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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一利郡 |
영어음역 | Illi-Gun |
이칭/별칭 | 이산군(里山郡),성산군(星山郡),가리현(加里縣)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
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성산면 대흥리 |
시대 | 고대/삼국 시대/신라,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류영철 |
[정의]
562년부터 757년까지 경상북도 고령 지역에 설치되었던 행정구역.
[개설]
일리군(一利郡)은 대가야가 신라에 멸망하는 562년(진흥왕 23)에서 757년(경덕왕 16)에 이르기까지 경상북도 고령군 성산면과 다산면 일대에 설치되었던 행정구역으로 달리 이산군(里山郡)으로도 불렸다. 이 시기 일리군의 치소는 오늘날 고령군 성산면 박곡리 원동마을로 보기도 하지만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 표기된 가리현(加里縣)의 위치로 볼 때 성산면 대흥리(大興里) 일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는 가야금을 만든 우륵(于勒)의 출신지인 성열현(省熱縣)을 치소로 추정한 바 있다.
[제정경위 및 목적]
신라 진흥왕은 562년 대가야를 멸망시킨 후 도읍지에 대가야군을 설치하고 대가야 당시 왕경의 직접 지배 지역 전체를 대가야군으로 편제하지 않고 오늘날 고령군 성산면·다산면 일대 지역을 분리하여 일리군으로 편제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신라가 옛 대가야의 행정구역을 편성하면서 직접 지배 영역을 축소·조정했을 가능성을 보여 준다.
[관련기록]
일리군의 지명 변천 과정을 알 수 있는 기본적인 자료는 『삼국사기(三國史記)』「지리지(地理志)」 강주 성산군조이며, 이후 편찬된 『고려사(高麗史)』「지리지(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비롯한 각종 지리지나 읍지 등의 자료는 대부분 『삼국사기』「지리지」를 따르고 있다.
[변천]
고령군 성산면·다산면 일대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시대부터이다. 이후 청동기시대와 삼한시대를 거쳐 대가야시대가 되면 성산면 지역은 대가야 왕도의 직접 지배 지역으로 편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성산면 무계리와 박곡리 일대에는 대가야시대에 축조된 무계리산성·봉화산성, 박곡리 고분군 등이 분포하고 있다. 박곡리 고분군에는 대가야계를 중심으로 신라 양식이 포함된 토기들이 출토되어 이곳의 낙동강이 신라 지역과 국경선을 이루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지역은 대가야 왕도의 서쪽을 방어하기 위한 교통·군사 요충지였고, 이러한 이유로 대가야 왕의 직접 통치 지역으로 편입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562년 대가야가 멸망할 당시 신라군도 이 지역을 통해 진군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고령군 성산면·다산면 지역은 대가야의 전략적 요충지로 기능하였던 곳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신라는 대가야를 멸망시킨 후 대가야 왕도에 대가야군을 설치하면서 성산면과 다산면 지역에는 별도의 행정구역인 일리군을 설치하였다. 이는 대가야군의 행정구역을 축소함으로써 그 세력을 약화시키고, 한편으로는 대가야군과 일리군이 상호 견제하는 효과를 노린 것으로 보인다.
일리군은 군치 지역인 성산면·다산면과 함께 그 예하에 사동화촌[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시 인의동 일대로 추정], 대목촌[지금의 경상북도 칠곡군 약목면 일대], 본피촌[지금의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일대], 적산촌[지금의 경상북도 성주군 가천면 일대] 등 4개의 행정단위를 두었고, 일리군에는 당주(幢主)[후에 태수로 바뀜]를, 나머지 지역에는 도사(道使)를 파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 일리군의 상급 행정기관은 하주(下州)였다.
이후 일리군은 신라와 백제의 다툼이 심했던 642년에서 644년까지 2년 남짓 백제의 영역에 속하기도 하였으나 김유신의 활약으로 신라에 귀속되었다. 685년(신문왕 5) 신라의 9주 5소경 체제가 정착되면서 일리군과 그에 영속된 사동화현·대목현·본피현·적산현으로 재편되었고, 일리군에는 태수가 지방관으로 파견되고, 나머지 현에는 현령이 파견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리군의 상위 행정구역도 하주에서 665년(문무왕 5) 거열주(居列州)[지금의 경상남도 거창 지역]로 바뀌었다가 685년 청주(菁州)[지금의 경상남도 진주 지역]로 바뀌었다.
757년(경덕왕 16) 일리군은 성산군, 사동화현은 수동현, 대목현은 계자현, 본피현은 신안현, 적산현은 도산현으로, 상위 행정구역인 청주는 강주(康州)로 개칭되었다. 고려 초기 신안현이 경산부로 승격되었고, 계자현은 약목현으로 개칭되었으며, 성산군은 가리현(加利縣)으로 개칭되고 신안현에서 승격된 경산부의 속현(屬縣)이 되어 읍격이 크게 축소되었다.
고려시대의 속현에는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았으므로 가리현은 읍사(邑司)를 중심으로 지방 향리들에 의해 통치되었다. 이 시기 가리현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가리이씨의 시조로 『제왕운기(帝王韻紀)』를 지은 이승휴(李承休)가 있다. 이후 고령군 성산면 일대는 조선시대를 거쳐 구한말에 이르기까지 성주목의 속현으로 존속하다가 1906년 다시 고령군으로 편입되었다. 현재의 지명으로 사용되는 성산면은 757년 일리군에서 성산군으로 바뀌었을 때의 명칭에서 따 온 것이다.
[현황]
일리군이 설치되었던 성산면 지역은 대가야시대 신라와 국경을 접한 교통·군사 요충지로 이후에도 낙동강 서안에서 낙동강을 건너 대구 방면으로 진출하는 교통의 요지로서 꾸준히 중시되었다. 현재도 고령에서 대구로 향하는 국도 26호선과 고속국도 12호선, 고속국도 45호선이 성산면을 통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