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003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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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石器時代 |
영어의미역 | Stone Ag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
시대 | 선사/석기 |
집필자 | 신종환 |
[정의]
고령 지역에서 돌을 이용하여 칼, 도끼 따위의 도구를 만들어 쓰던 시대의 역사와 문화.
[개설]
고령군의 동쪽 경계를 이루는 낙동강 강변에는 비교적 완만한 경사면을 이루는 저평한 침식 구릉지대가 발달해 있고, 부분적으로 신생대 플라이스토세 지층이 확인된다. 행정구역상 다산면과 개진면의 일부에 해당하는 이곳에서는 구석기시대의 여러면석기[多角面圓球]와 찍개 등이 채집된다. 이를 통해 고령 지역에서는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나 고령 지역에서는 아직까지 신석기시대의 유적이 확인된 바가 없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고령의 신석기시대 문화와 예술을 논의할 직접적인 자료가 없는 실정이다. 다만, 낙동강 변과 그에 유입되는 각 지류 주변에 발달한 충적 지형에서는 신석기시대 유적이 분포할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그 문화상은 여타 지역의 신석기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여겨진다. 주변 지역에서 확인된 신석기시대의 유적은 낙동강 대안의 대구 월배 선상지와 금호강 하류 역에서 확인되고 있다.
[구석기시대 유적과 유물]
고령 지역에서의 구석기시대 유적은 주로 낙동강 주변의 하안 단구 지형에서 찾아지고 있다. 고령군의 동쪽 경계를 이루는 낙동강은 고령 지역을 통과하면서 유난히 크게 곡류하는 현상을 보이는데, 그 연안에 형성된 다산면과 개진면 일대의 저평한 침식 구릉지대에서 구석기시대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다산면 상곡리 유적은 완만한 구릉성 야산의 말단부로서 계단상의 논으로 경작되고 있는 곳으로 홍적세층이 잘 발달해 있는 곳이다. 앞쪽으로 낙동강과 접해 있고 그 건너 쪽은 낙동강으로 유입되는 금호강의 하구(河口)가 보이는 곳이다. 유물은 상곡마을에서 곽촌마을로 가는 골짜기 주을지 아래의 골짜기를 두고 상곡마을 쪽의 산기슭 논에서 주로 채집된다. 출토 유물은 석영암으로 된 여러면석기를 비롯하여 찍개, 돌날 등이다. 이곳은 서쪽의 산지로부터 낙동강이 있는 동쪽으로 완만하게 경사지는 지형으로서 근래 계단식으로 정지하여 논으로 사용하고 있다. 계단상으로 절토된 논둑 단면에서는 쐐기 토양이 발달된 것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개진면 구곡리에 있는 고령기와 공장 주변은 낙동강의 하안 단구 지대이다. 현재는 제방을 높게 쌓아 낙동강의 범람으로부터 보호되는 지역이지만 충적세를 전후하여 여러 차례 범람이 이루어진 지역으로 판단된다. 고령기와 공장에서는 주변의 논을 파헤쳐 기와를 만들기 위한 점토를 구하고 있는데, 깊이 15m 정도까지 굴착하면서 강안 단구의 홍적세 점토층을 이용하고 있다. 이곳에서 퍼올려진 흙더미 속에서 구석기시대의 유물들이 찾아진다. 유물은 주로 석영암으로 된 여러면석기를 비롯하여 찍개류, 돌날 등이다.
또한 개진면 반운리 일대에 있는 고령 지역의 대표적인 원삼국시대 유적인 반운리 유적의 남쪽 사면에서도 석영맥암으로 된 여러면석기가 채집된다. 이곳은 안림천 제방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회천의 범람에 영향을 받을 정도로 지대가 낮으며 산지로부터 흘러내리는 사면 붕적 점토층이 형성되어 있다.
[신석기시대 유적과 유물]
지금부터 약 1만 년 전에서 3천 년 전까지의 기간에 해당하는 우리나라 신석기시대는 빙하기 이후에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면서 토기와 간석기를 만들고 정착 생활을 시작한 시기이다. 어로와 사냥, 채집 활동과 함께 부분적인 농사를 지었던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실로 짠 옷감이나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으며, 꾸미개로 몸을 치장하였다. 고령 지역에서는 지질학적으로 충적세시기에 해당하는 신석기시대의 유적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다만 낙동강과 그에 유입되는 작은 지류들이 발달한 지형적인 조건과, 대구를 비롯한 김천·합천·거창 등의 신석기시대 유적들을 참고할 때 고령 지역에도 곳곳에 신석기시대의 유적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 낙동강의 동쪽 대안인 대구광역시 월성동 지역에서 즐문토기편이 출토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