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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900263
한자 沙門津址
영어음역 Samunjinnaruteo
영어의미역 Samunjin Ferry
분야 역사/전통 시대,지리/인문 지리,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터
지역 경상북도 고령군 다산면 호촌리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황상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나루터
소재지 주소 경상북도 고령군 다산면 호촌리 지도보기

[정의]

경상북도 고령군 다산면 호촌리에 있던 조선시대 나루터.

[개설]

경상북도 고령군 다산면 호촌리 마을은 조선 인조 때 개척되었는데, 낙동강 범람으로 인해 늪이 여기저기 많이 생겨 ‘늪마을’이라 하다가 120여 년 전 이씨라는 선비가 들어와 마을 앞 큰 호수를 보고 ‘호촌’이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또한 낙동강이 범람할 때 이곳 흙을 많이 훑어갔다고 ‘훑촌’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1906년(고종 43) 고령군으로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사천동, 사동, 사문(沙門), 사문(寺門)이라 하였다. 사문(沙門)은 낙동강 홍수로 인해 마을이 형성되어 호촌2리에서 모래를 거쳐 배를 탄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그리고 큰 절로 가는 관문이기 때문에 사문(寺門)이라고도 불려졌다.

[변천]

사문진나루터는 조선 전기 낙동강과 금호강을 연결하는 하천 교통의 요지이자 대구로 통하는 관문 역할을 수행하는 나루였다. 낙동강은 일본 무역상들은 물론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상인들의 대표적 물품 수송로이기도 하였는데, 낙동강과 금호강이 합류하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성산1리와 경상북도 고령군 다산면 호촌2리를 잇는 사문진나루터가 가장 번창해 1486년(성종 17)까지 대일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사문진나루터낙동강 상류와 하류를 연결하는 하천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왜에서 이입된 물품을 보관하는 화원창(花園倉), 왜물고(倭物庫)를 설치하기도 하였는데, 사무역의 발달로 15세기 후반에 폐쇄되었다. 하지만 사문진나루터는 해방 이후까지 부산의 구포와 경상북도 안동 지역을 오르내리는 낙동강 뱃길의 중간 기착지 역할을 해 왔다. 조선시대 대소비지 대구를 대상으로 하는 남해안의 돛단배나 범선의 입출항이 잦았는데, 주요 운송 해산물로는 소금, 미역, 김, 어물 등이 주를 이루었다.

또한 대구에 처음으로 피아노가 들어왔던 곳이 바로 사문진나루터였다. 1901년 5월 이른 아침 피아노 1대가 어설프게 포장되어 인부 30여 명에 의하여 소달구지에 옮겨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나무토막 안에 죽은 귀신이 들어 있어 괴상한 소리를 낸다며 신기해 하였다. 사문진나루터를 통해 대구로 운반된 피아노의 주인은 동산병원(현 계명의료원)을 세운 존슨(Johnson)의 아내 에디드 파커(Edith Parker)였다.

1940년 초까지 사문진나루터를 통하여 전국의 물자들이 대구로 운반되었는데, 당시 대구에 집산된 물자는 쌀 20만 석, 콩 10만 석, 우피 40만 근과 그 밖의 잡곡, 양재, 잡화 등과 소금 10만 석, 석유 3만 5,000상자, 성냥 6,000상자, 옥양목 6만 단, 무명 10만 단, 방적사 1,000가마와 그 밖의 견, 면직물류, 약재, 잡화 등이다. 이것들의 약 5분의 2가 대구 시장을 통해 분산 소비되었고, 나머지 5분의 3 정도는 대구를 중계지로 하여 대부분 낙동강을 통해 부산 및 상류 각지로 수송되었다.

이 밖에 고령군 다산면 지역에서 생산된 농산물이 사문진나루터를 통해 대구 지역 재래시장에 판매되었는데, 이를 위해 2척의 배가 하루 70회 정도 오갔었다는 기록이 있어 많은 이들이 이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도선 운영권은 주로 입찰로 정해졌고 승객 대부분은 서쪽 고령군 다산면 주민들이었다. 도선은 처음 장대를 이용해 사람의 힘으로 저어 다니는 목선이었으며, 이후 자동차 엔진을 갖다 붙였고, 나중에는 엔진이 달린 철선으로 바뀌었다.

1985년 6월 1일 도입된 철선의 규모도 10t급으로 한 번에 60명의 승객과 차량 6대를 운반할 수 있었다. 특히 승객이 몰리는 출퇴근 시간에는 1시간에 3~4회, 낮 시간대는 시간당 1회 정도 고령과 달성을 오갔다. 당시 하루 평균 100여 대의 차량과 1,000여 명의 승객을 실어 날랐다. 운임은 마을 사람이면 1년에 벼 1말 5되 정도를 선주에게 지불하고, 일반인은 1인당 500원, 중학생 이하는 무료였다.

도선이 운항될 때만 해도 여름철이면 대구 시민들이 고령 쪽 낙동강 모래사장을 찾았다. 다산면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1978년 8월에는 모래찜질이나 목욕을 하기 위해 사문진나루터를 이용한 사람이 8,0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 덕분에 화원유원지도 유명해졌다.

철도 개통 후 사문진나루터는 대구 이출입 화물을 철도편에 빼앗겨 예전과 같은 대구와의 관계는 끊어지게 되었고, 1993년 7월 1일 사문진교가 개통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아울러 사문진교 준공과 동시에 한여름 나루터 근처 모래사장을 찾던 피서객들도 자취를 감추었다.

[현황]

2010년 현재 사문진나루터는 대구광역시 정수장으로 바뀌어 있다. 사문진나루터가 있던 곳 위로는 2009년 총사업비 400억 원을 들여 교량 780m, 연결 도로 670m를 2차선에서 4차선으로 확장 개통한 사문진교가 설치되어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1.11.29 내용 수정 1) 인부 20여 명에 의하여 소달구지에 옮겨지고 있었다. ->인부 30여 명에 의하여 소달구지에 옮겨지고 있었다. 2) 피아노는 1907년 3월 동산병원 옆 동산언덕에 있는 신명여학교[현 성명여자중학교, 신명여자고등학교]를 세운 미국 여선교사 마르타 스콧 브루엔(Martha Scott Bruen)[한국명 부마태]이 기증한 것이었다. ->피아노의 주인은 동산병원(현 계명의료원)을 세운 존슨(Johnson)의 아내 에디드 파커(Edith Parker)였다.
이용자 의견
*** 반영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2011.11.29
손** 본인의 연구로 인하여, 대구 최초의 피아노가 사문진을 통해 들어왔음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피아노를 옮길 때 20명이 아니고, 30명이 동원되었으며, 또한 피아노의 주인이 신명여학교를 세운 마르타 스콧 브루엔(Martha Scott Bruen)이 아니고, 동산병원(현 계명의료원)을 세운 존슨(Johnson)의 아내 에디드 파커(Edith Parker)입니다. 2011.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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