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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900010
한자 燦爛-古代文化-再現-大加耶博物館野外展示館
분야 문화·교육/교육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지산리 460[대가야로 1203]지도보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정동락

[개설]

대가야박물관 야외전시관은 고령 지역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석탑과 불상 등 불교 관련 문화재를 비롯해 추정, 복원한 대가야시대의 집과 창고, 제철로(製鐵爐) 등이 전시되어 있다. 관람객들은 대가야박물관 야외전시관에서 경상북도 고령군에서 출토된 29개의 유물 및 유적 실물과 모형을 통해 대가야와 고령 지역의 역사를 만나볼 수 있다.

[찬란한 고대 문화의 보고 대가야박물관]

대가야 왕릉이 모여 있는 주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대가야박물관대가야읍 지산리에 위치한 대가야왕릉전시관과 대가야역사관, 그리고 대가야읍 쾌빈리에 위치한 우륵박물관 등으로 이루어진 국내 유일의 대가야 전문 박물관이다.

2000년 9월에 개관한 대가야왕릉전시관은 국내에서 최초로 확인된 대규모 순장 무덤인 지산동 44호분 전문 전시관이다. 지산동 44호분의 내부를 원래의 모습대로 재현해 놓아 관람객들이 실물 크기로 복원된 44호분 속으로 들어가 무덤의 구조와 축조 방식, 주인공과 순장자들의 매장 모습, 껴묻거리의 종류와 성격 등을 직접 볼 수 있게 꾸며져 있다.

2005년 4월에 개관한 대가야역사관은 대가야의 역사와 문화를 중심으로 구석기시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고령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꾸며 놓았다. 또한 연간 1~2회 정도 기획전을 개최할 수 있는 기획전시실과 어린이체험학습실, 대가야궁 사진촬영소, 야외전시장 등이 갖추어져 있다.

우륵박물관은 악성 우륵이 가야금을 만들어 연주한 것으로 전하는 대가야읍 쾌빈리가야금골[일명 금곡(琴谷)·정정골]에 위치하고 있다. 가야금을 만든 악성 우륵과 관련된 자료를 발굴·수집·보존·전시하여 국민들이 우륵과 가야금의 세계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건립한 우륵과 가야금 테마 박물관이다. 전시실은 ‘악성 우륵을 찾아서’, ‘악성 우륵’, ‘가야의 혼을 지킨 우륵’, ‘민족의 악기 가야금’, ‘우륵과 후예들’ 등 모두 5개의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맑고 깨끗한 가야금의 고장 고령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우리 민족 고유의 악기인 가야금을 체험하고, 가야금 창시자인 우륵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살아 있는 교육의 장이자, 어른들에게는 잊혀져 가는 전통 음악의 향기를 간직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곳이기도 하다.

[대가야박물관 야외전시장의 이모저모]

1. 불교 문화재

대가야박물관의 입구 좌우측에 있는 야외전시장에는 석탑과 불상 등 여러 불교 문화재가 전시되어 있다. 이 문화재들은 원래 고령군 관내의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것을 모아 고령향교 뒤편의 연조공원에 전시하던 것을 2004년 12월 현재의 자리로 옮긴 것들이다. 먼저, 돌로 만든 불상은 모두 4기로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원래는 좌대와 광배를 갖춘 우수한 석공예품이었으나 오랜 풍상에 마모, 훼손되어 안타까울 뿐이다.

그 중 석조비로자나불 좌상은 비교적 무른 사람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파손이 심하고 양쪽 무릎은 대부분 결실되었다. 목이 부러져 시멘트로 접합된 머리 부분도 두 눈이 움푹 파여 있다. 평평한 판석상의 광배도 심하게 마모되었으나 두광과 신광을 나타낸 선각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나, 네모난 좌대는 근래 화강석으로 새로 만든 것이다.

목이 부러져 머리 부분이 없어진 석조여래좌상은 4구의 석불 좌상 가운데 크기가 가장 크다. 원형의 앙련좌대에 앉아 있다. 퉁퉁하게 표현된 몸통과 팔에서 풍만한 양감이 느껴지며, 빼어난 조각 기술을 보여 주고 있다. 광배는 주형 광배로 두광과 신광을 구획하여 표현하였고, 가장자리에는 화엄을 표현하였으나 이 역시 마모가 심하다.

또 다른 목이 없어진 불상은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 촬영된 사진에는 머리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후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결가부좌한 모습이며, 가슴에 목걸이 장식이 드리워져 있고, 양쪽 팔의 상박에는 팔찌가, 하박에는 천의 자락이 부조되어 있으나 마모가 심하여 희미하다. 등에서 어깨로부터 드리워진 천의가 층을 이루는 옷 주름으로 부조되어 있고, 허리에는 허리띠가 표현되어 있다. 광배는 주형 광배로 상단부와 하단부가 파손되었다. 두광과 신광이 구획되어 새겨져 있으며, 가장자리에는 불꽃 무늬가 새겨져 있다.

마지막으로, 역시 목이 부러져 머리가 없어진 석상이 한 기 있다. 이 불상은 원형의 대좌 위에 놓여 있는데, 대좌는 앙련이 부조되어 있으나 원래 이 불상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양 무릎이 파손되었으며, 왼손은 가슴높이에 대고 오른손은 그 아래 복부에 댄 형태이다. 일견 지권인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두 손이 떨어져 있어 약사불이거나 보살상일 가능성도 있다. 법의는 양팔에 옷자락이 걸쳐져 드리워진 형태이며, 앞면은 풍화가 심해 잘 알 수 없으나 등에 표현된 형태로 보아 우견편단으로 보인다. 화강암으로 조각되었으나 풍화가 심해 매우 거친 편이다.

다음으로 2기의 석탑 중 1기는 비교적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으나, 나머지 1기는 3층 탑신과 옥개석이 없어져 현재는 2층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2기의 석탑이 형태와 규모가 매우 유사하여 동일한 사원의 쌍탑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는 완전한 형태인 3층 석탑의 모습을 살펴보기로 한다.

석탑의 지대석과 하층 기단 면석은 없어졌지만, 2매로 조합된 갑석은 잘 남아 있다. 상층 기단은 우주와 탱주가 각각 1개씩 부조된 4매의 면석을 짜 맞추어 기단을 이루었다. 상층 기단의 갑석도 역시 2매의 판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하층의 기단갑석은 모두 평평한 판석의 형태이며, 네 모서리에는 약하게 각을 이루며 우동을 표현하였다. 3개의 탑신은 모두 1개의 돌로 만들었으며, 우주만 약간 도드라지게 표현하였다. 각층 옥개석의 옥개 받침은 1층은 4단, 2층과 3층은 3단으로 되어 있어 신라 하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석탑들은 6·25전쟁 때 미군기의 폭격으로 파손되어 흩어진 것을 새로 복원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대가야역사관 부지 발굴 조사에서 수습된 탑신석 2매를 비롯한 석탑의 부재들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불상과 석탑 외에도 1기의 석등이 있는데, 이 석등은 돋을새김 된 쌍잎의 연꽃무늬가 엎드린 모양을 한 복련 하대석과 팔각기둥 모양의 중대석, 그리고 양각된 쌍 잎의 연꽃무늬가 위로 향한 앙련 상대석이 기단부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그 위에 사각형의 화사석과 옥개석을 얹었는데, 화사석은 근래에 만들어 넣은 것이다. 옥개석의 네 모서리에는 삼엽의 귀꽃을 조각하였으며, 풍경을 달았던 못 구멍이 나 있다.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그 외에도 약 10여 개의 앙련과 복련의 석등 부재들이 전시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3기의 귀부가 전시되어 있는데, 이들 귀부는 전체적으로 머리와 몸체, 발과 꼬리 등이 갖추어져 있으나 형태만 겨우 알 수 있을 만큼 마모가 심하다. 조각 수법도 거칠고 조잡하며, 귀부의 윗부분에는 비석을 고정시켰던 사각형의 홈이 파여져 있지만 비석은 없어졌다. 조선시대의 작품으로 보인다. 그리고 5~6매의 장대석으로 보이는 석재도 전시되어 있다.

2. 문인석

대가야역사관에서 왕릉전시관으로 올라가는 통로 우측 편에는 한 쌍의 문인석이 서 있다. 이 문인석은 원래 고령군 다산면 상곡리 야산에 있던 것인데, 도난을 당하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고 2007년 현재의 위치에 세워졌다. 규모는 키가 190㎝, 220㎝ 정도이다. 전체적인 모습은 복두공복(幞頭公服)으로 보이며, 손은 마치 합장을 한 듯 보이나 홀을 쥔 것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얼굴은 몸에 비해 둥근데, 왕방울 눈에 주먹코, 두터운 입술을 하고 있다. 몸체는 간략히 묘사하고, 허리 부분에는 관대를 표현하였다. 전체적으로 매우 투박하고 토속적인 느낌을 준다. 정확한 제작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복두공복을 한 것으로 보아 16세기 후반이나 17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3. 대가야시대 움집과 다락창고

대가야박물관 입구 좌측에는 2006년에 복원한 대가야시대 움집과 다락창고가 있다. 이는 최근까지의 발굴 조사와 집 모양 토기 등을 통해 확인된 것을 추정 복원한 것이다.

1) 움집[수혈주거(竪穴住居)]

움집은 고령군 지산리대가야박물관 맞은편에 있는 대가야테마공원을 만들기 위한 발굴 조사에서 확인된 유적을 토대로 만든 것이다. 기본적인 형태는 ‘⌂’형을 하고 있으며, 땅바닥 아래로 약 10㎝ 정도 깊이로 파 놓은 움집이다. 바닥에는 뒤편으로 치우쳐 불을 지핀 화덕자리가 있고, 벽을 따라 연기가 양쪽으로 나가도록 한 난방 시설인 구들이 시설되어 있다. 대가야의 왕족과 귀족 등은 궁궐을 중심으로 벽돌과 기와 등으로 집을 지어 살았던 데 비해, 움집은 주로 신분이 낮은 일반인들이 살았던 집으로 추정된다.

2) 다락창고[고상가옥(高床家屋)]

다락창고는 가야시대 유적에서 발굴된 건물 터와 집 모양 토기를 토대로 만든 것이다. 다락창고는 집 바닥을 지면보다 높게 만든 건축물이다. 주로 곡식이나 숯 등을 저장하여 습기를 방지하는 창고의 용도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4. 제철로 모형

대가야왕릉전시관의 부속 건물인 매점 옆에는 대가야시대의 제철로 모형 2기가 전시되어 있다. 이 제철로는 지금까지 고고학적으로 밝혀진 우리나라의 철 생산 유적으로서 가장 앞선 시기인 충청북도 진천군 석장리 유적에서 확인된 원통 모양의 제철로 2기를 모델로 하여 제작된 것이다. 높이는 120㎝, 직경은 60㎝ 정도이다.

대가야박물관에서는 대가야의 철 생산 기술을 알아보기 위해 2005년 5월 고대의 방식대로 이 제철로를 만들고, 고령군 쌍림면에 있는 고대 철 생산 유적 주변에서 철광석을 채취하여 참나무 숯과 함께 제철로에 넣고 12시간 이상 풀무질로 바람을 불어 넣으며 철광석을 녹여 냈다. 그 결과 철이 만들어졌고, 유리와 같은 찌꺼기도 흘러 나왔다. 이러한 실험 내용은 2005년 6월 3일 KBS 방송국에서 제작한 ‘역사스페셜’에서 방영된 바 있다.

대가야를 비롯한 고대의 철 생산 과정은 크게 제철로 제작, 철광석 채취 및 숯 만들기 등의 준비 과정을 거쳐 제철로에 불을 피우고 숯과 철광석을 녹여 철을 만들어 내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대가야에서는 이렇게 만들어진 철로 도구나 무기를 만들기 쉽도록 일정한 형태의 납작한 철판, 즉 덩이쇠[철정]로 만들고, 이를 마치 굴비 엮듯 여러 매씩 끈으로 엮어 유통하였는데, 멀리 중국이나 왜는 물론 고구려·백제·신라에 수출되기도 하였다.

5. 지산동 30호분

대가야왕릉전시관 전면에는 그리 크지 않는 독립된 고분 한 기가 위치하고 있는데, 바로 지산동 30호분이다. 이 고분은 1994년 대가야왕릉전시관 건립을 위해 발굴 조사를 실시하면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지산동 30호분은 가운데 주인공이 들어가는 가장 큰 으뜸돌방을 중심으로 그 서쪽에 딸린 돌방이 T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으뜸돌방의 동쪽과 남쪽, 북쪽에 각각 1개씩의 순장돌덧널이 배치되었고, 으뜸돌방 바닥 아래에서 또 하나의 순장돌덧널이 조영되어 있다. 무덤이 2중으로 겹쳐 만들어진 셈인데, 아마도 순장자를 주인공의 아래에 묻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가야 묘제에서는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현상이다.

지산동 30호분에서는 또 남쪽 순장돌덧널에서 11세 이하의 남자아이로 추정되는 인골과 함께 소형 금동관이 출토되었다. 이는 순장돌덧널에 매장된 자가 금동관을 쓴 독특한 사례로, 순장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자료가 되었다. 특히, 주인공이 묻힌 으뜸돌방과 그 아래 순장돌덧널의 뚜껑돌에는 선사시대 바위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이것은 고분을 축조한 사람들이 바위그림이 새겨져 있던 돌을 채석해 왔기 때문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지산동 30호분을 만들던 시기에 이미 암각화가 종교적·신앙적인 의미를 상실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지산동 30호분은 고분의 구조와 순장덧널에서의 금동관 출토, 무덤 뚜껑돌에 새겨진 암각화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독특한 양상을 보여 주고 있다. 이 고분은 발굴 조사 후 현재는 원형을 복원해 놓아, 대가야박물관을 찾는 관람객들에게 1,500여 년 전 대가야시대의 이야기를 말없이 전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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