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000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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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鐵-王國大加耶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가야 |
집필자 | 신종환 |
[개설]
대가야의 성장에는 철광 개발과 이를 통한 철의 생산이 큰 기반이 되었다. 철의 왕국으로 알려진 대가야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나라 고대 제철의 일반적 특징에 대해서 간략히 살펴보고, 고령 지역은 물론 인근의 합천 지역 등 대가야의 중심 영역에서 확인되는 제철 유적들을 검토해 봐야 한다. 여기에서는 이와 관련한 문헌 자료들을 검토한 후, 이를 통해 대가야의 제철 기술을 유추해 보고자 한다.
[대가야는 어떻게 성장했을까]
후기 가야 사회를 주도한 대가야의 성장 배경을 두고 학계에서는 다양한 의견들이 제시되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설득력을 가지는 것이 대량의 철 생산을 통한 경제적, 군사적 성장이라 할 수 있다. 5~6세기 무렵 대가야가 고대 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가야산 남서쪽에 분포하는 철산 개발을 통한 활발한 철의 제련과 이를 통한 철 생산이 크게 작용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대가야시대의 제철 유적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다만 합천군의 야로(冶爐)가 그 지명이 나타내는 의미와 함께 대가야의 철 생산을 이해하는 자료로 자주 인용되고 있다. 또한 후대의 기록들이지만 1452년(문종 2)에 간행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와 그 40여 년 후인 1496년(연산군 2)에 편찬된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志)』를 비롯해 1530년(중종 25)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에 이 지역의 철 생산에 대한 기사들이 간략하게 수록되어 전한다.
이러한 문헌 기록과 관련해 가야산 남서쪽의 제철 유적은 합천군 묘산면과 야로면, 고령군 쌍림면 등에서 6개소 정도가 파악된다. 그러나 이들은 대부분 조선시대 제철 유적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되며, 대가야의 제철을 보여 주는 유적은 현재까지 확인할 수 없다. 야로라는 지명을 통해 고찰한다면 통일신라시대까지는 소급이 가능할 것 같다. 어찌됐든 대가야의 철 생산은 이러한 지역적 특성을 바탕으로 전개되었을 것이 거의 확실하다.
[고대 제철의 생산 과정은 어땠을까]
고대 사회에서의 철 생산은 고도의 기술적 수준이 요구된다는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경제적·군사적으로 미치는 영향력이 막대하여 대부분 국가가 관장하는 형태로 운영되었다. 철광석을 제련하기 위해서는 우선 철의 원료가 되는 철광석 또는 사철의 확보가 용이해야 하며, 이를 녹여서 환원하는 데 필요한 많은 연료의 공급이 원활해야 한다는 점이 필수적인 요건이다.
일반적으로 제련의 입지 선정에서는 원료보다 운반비용이 더 드는 연료를 보다 많이 고려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 밖에도 생산과 유통의 측면에서 교통과 운송 수단 등이 고려되었으며, 운영 과정을 통제 관리하기 위한 측면도 중요한 부분이었다. 따라서 고대의 철 생산 유적은 대체로 경제성이 있는 양질의 철광 산지와, 대량의 목탄을 생산할 수 있는 연료 공급지를 입지 조건으로 삼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철 생산에는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우선 양질의 철광석이 필요하다. 철광석의 종류는 다양하지만 보통 사철(砂鐵)과 자철광(磁鐵鑛)이 제철의 원료로 가장 많이 쓰인다. 다음은 풍부한 산림 자원으로부터 생산되는 대량의 목탄이 필요하다. 철광석을 재련하는 데는 많은 목탄이 필요한데, 목탄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벌목과 운반은 물론 목탄요를 축조할 수 있는 전문적인 생산 체계를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제철로의 축조에는 점토와 모래·물 등은 물론, 철광석을 선광(選鑛)하고 파쇄 또는 배소(焙燒)하기 위한 시설도 필요하다. 또 송풍 장치를 갖추어야 하는데, 송풍을 위한 토제 송풍관의 제작은 토기 가마와의 협조가 필요한 부분이다. 이 밖에도 연료 및 재료 보관과 장기 조업에 따른 주거와 취사 시설 등 각종 부대시설들이 필요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철 생산 작업을 수행하기 위한 전문 기술자를 비롯하여 많은 인력이 필수적이었다.
철광석과 목탄이 확보되면 제련로(製鍊爐)를 축조해야 한다. 제련로는 고온을 견딜 수 있도록 점토에 모래, 짚 등을 함께 이겨 만들었다. 고대의 제철로는 이처럼 대부분 점토를 이용해 축조했으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돌과 점토를 함께 사용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목탄을 넣고 가풍하며 고온의 상태를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하로부터의 습기를 차단하는 기초 시설을 먼저 갖추고 그 위에 노를 축조해야 한다. 고대의 제철로는 원형이 많지만 장방형이나 방형의 경우도 더러 보인다.
다음은 제련로에서 생산된 괴련철 혹은 부분적으로 선철이 함유된 괴련철을 소재로 하여 다시 정련하는 정련로(精鍊爐)가 있다. 정련로에는 단조 철기 생산에 필요한 제강 공정이 있고, 한편으론 제련된 철괴를 장시간 가열하며 탄소량을 높여 선철을 만드는 공정이 있다. 즉, 정련 단계의 공정에서 단조와 주조의 소재가 구분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정련로에서 만들어진 선철을 용해하여 주조 작업을 하는 용해로(鎔解爐)가 있고, 정련 과정에서 제강된 소재를 이용한 단조 작업의 단야로(鍛冶爐)가 있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는 반드시 인위적인 가풍 장치가 필수적인데, 이때 풀무와 송풍관이 사용된다. 제철 작업에서는 높은 온도를 장시간 유지하는 것이 조업의 성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건이 되며, 따라서 목탄을 연료로 인위적인 가풍을 하지 않고서는 제련 작업이 거의 불가능하다.
[고령 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제철 유적지는 어디일까]
고령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대가야 지역의 제철로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 조사는 2004년 경남고고학연구소에서 실시한 야로면 야로리 돈평마을 유적에 대한 시굴 조사가 처음이었다. 이렇듯 본격적인 발굴 조사 자료가 많지 않을 뿐더러 제철 유적을 대상으로 한 정밀 지표 조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고령 지역의 제철 유적지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앞서 문헌 자료에 나타나는 지역들을 중심으로 현재까지 확인 가능한 제철 유적의 분포 현황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는데, 이들은 모두 안림천 유역에 해당한다.
용리 제철 유적은 미숭산[해발고도 734m] 남사면에 형성된 골짜기에 위치한 고령군 쌍림면 용1리에 있다. 이 마을은 해발고도가 270m 정도 되는 골짜기에 있는데, 일명 ‘시부리터[쇠부리터]’로 불리는 곳과, 그 북쪽으로 약 500m 정도 떨어져 마주 보이는 속칭 ‘무시골[무쇠골]’로 불리는 같은 골짜기 안의 2개소에서 제철 유적이 확인되었다.
이 밖에 유적 주변에는 대가야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고분군이 분포하고 있고, 대가야 토기를 비롯한 고려시대의 토기 편과 청자 편, 조선시대의 분청사기 편과 백자 편 등이 채집되었다. 그러나 용리 제철 유적의 조업 시기는 여러 가지 정황을 종합해 볼 때 고려시대 이후로부터 조선시대 전기에 걸치는 시기로 추정되고 있다.
해인사에서 내려오는 홍류동 물줄기는 월광사 앞에서 가야면에서 내려오는 물줄기를 합하고 다시 야로면을 거쳐 내려오다 묘산면에서 내려오는 물줄기를 합해 안림천을 이룬다. 야로면과 묘산면으로부터 내려오는 물줄기가 합류하는 지점의 만대산[해발고도 688m]으로 오르는 골짜기에 산주리가 위치한다. 산주리 제철 유적은 산주리 마을 뒤 만대산 중복에 위치하고 있다.
3. 합천군 야로면 야로리 제철 유적
야로리 제철 유적은 행정구역상 합천군 야로면 야로2구에 해당하며, 자연부락인 돈평마을 뒤에 있는 미숭산 자락의 산기슭에 입지하고 있다. 이 유적은 앞의 쌍림면의 용리 제철 유적과 미숭산에서 내려오는 산줄기의 능선 하나를 사이에 두고 위치하고 있어 과거에는 고갯길을 이용하여 가깝게 연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야로리 제철 유적은 2004년 합천군의 의뢰를 받은 경남고고학연구소에서 시굴 조사하였다. 조사 결과 비교적 좁은 범위에서 4기의 제철 흔적이 확인되었는데, 특히 그 가운데 원형로를 갖춘 전방 후원형의 제련 시설이 확인된 점은 고대 전통 제련로와의 연결 가능성을 보여 주는 좋은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유적에서도 조선시대의 자기 편이 함께 채집되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 전기 이전으로 소급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
4. 합천군 묘산면 사리 제철 유적
묘산면에서 합천읍으로 통하는 국도 24호선을 따라 1.5㎞ 정도 가면 시골 마을치고는 비교적 큰 마을이 나타나는데 이곳이 관기리, 즉 ‘심묘’라 불리는 곳이다. 『세종실록지리지』를 시작으로 문헌 자료에 나타나는 ‘야로현(冶爐縣) 심묘리(心妙里)’는 바로 이 일대를 두고 한 말이다. 사리 제철 유적은 사리2구의 진지마을 옆에 있는데, 이 진지마을은 한편으로 ‘개금부리’라고도 불린다. 격자타날문 및 회전성형을 한 고려시대의 토기 편과 청자 편, 조선시대의 분청사기 및 백자 편 등이 채집되어 고려시대부터 시작된 제철 유적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이곳에서 수백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도 속칭 ‘쇠꼬지’라 불리는 곳이 있다. 이곳 역시 앞의 ‘쇠꼬단’과 같이 철 생산과 관련된 지명으로 보인다. 아무튼 채집 유물과 문헌 기록을 종합해 볼 때 『세종실록지리지』 이후로 나타나는 야로현 심묘리의 철 생산은 이곳 사리 제철 유적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이 분명한 것 같다. 이밖에도 합천군 가야면 죽전리의 대밭골 유적과 석계 유적 등이 있으나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철의 왕국 대가야를 보여 주는 문헌 자료들]
고령 지역을 비롯한 대가야의 중심지에서 철 생산과 관련된 구체적인 기록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구체적으로 기록되고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비로소 토산으로 사철(沙鐵)이 등장하는데, 야로현 남쪽 심묘리의 철장(鐵場)에서 9,500근이란 꽤 많은 양의 정철(正鐵)을 세공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경상도속찬지리지』의 ‘합천군’ 조에서는 군 북쪽의 가조천에서 황금이 생산되어 세공이 이루어졌고, 야로현 심묘리에서 생산된 사철의 품질이 중품이라는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만 세공한 정철의 양은 크게 줄어든 500근에 불과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토산품으로 철이 있고 야로현 심묘리에서 난다는 간략한 기사만 전한다. 이는 1656년(효종 7)에 간행된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며, 1864년(고종 1)경 김정호가 편찬한 『대동지지(大東地志)』에 와서는 더욱 소략하게 기록되고 있다.
이상의 문헌 자료를 종합해 보면 야로현에서의 철 생산은 심묘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15세기 중엽경 가장 활발히 전개되었고, 19세기 중엽까지 계속 철을 생산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언제부터 철 생산이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단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19세기 후반 어느 시점에 들어 철 생산이 중단된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야로현의 심묘리에서는 문헌 기록상으로는 적어도 1452년(단종 즉위년)부터 1674년(숙종 즉위년)까지, 다시 말해 임진왜란을 전후한 200여 년 이상 일관되게 철을 생산했음을 알 수 있다.
[대가야의 제철 유적지를 찾아라!]
우리나라 최고의 기록인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보이는 ‘적화(赤火)’와 ‘야로(冶爐)’는 모두 철 생산과 관련이 있는 지명이라고 할 수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대로라면 늦어도 해인사가 창건[802년]되기 50년쯤 전에 해당하는 8세기 중엽부터 철 생산과 관련된 ‘야로’라는 지명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경덕왕[742~765] 때의 개명이 이루어지는 8세기 중엽의 어느 때가 아닌가 여겨진다.
그렇다면 문헌 기록상으로는 6세기 중엽에 멸망한 대가야의 철 생산을 유추할 근거가 현재로서는 없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15세기 중반에 와서야 비로소 구체적인 기록이 나타나지만 이 역시 『세종실록지리지』를 크게 앞서는 시기까지 이 지역의 철 생산을 소급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다만 유적지 현황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령군 쌍림면의 용리 제철 유적과 합천군 묘산면의 사리 제철 유적 등에서는 고려시대의 토기 및 청자 편 등이 채집되는 것으로 보아 『세종실록지리지』의 연대보다 어느 정도 앞선 시기로 올려 볼 수는 있을 것 같다.
또 하나, 이 지역의 제철 유적을 중세 사회까지 소급해 볼 수 있는 가능성은 조선 후기의 근대 제철 유적과는 다른 측면들이 보인다는 점 때문이다. 즉, 석축 사도(斜道)를 양쪽으로 마치 날개처럼 길게 쌓아 만들고 그 가운데 지상식 제련로를 설치하는 이른바 ‘쇠부리 제철로’의 형태가 이 지역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쇠부리 제철로는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17세기경부터 사용된 것으로 보는데, 야로를 비롯한 주변 유적에서는 현재 이와 같은 구조의 제철로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처럼 8세기 중엽경 제철 조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짐으로써 얻게 된 것으로 보이는 야로라는 지명이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는 있지만 신라 말에서 고려시대에 이르는 기간의 제철 관련 자료는 아직 확인된 것이 없다. 그러나 현재 확인되는 유적이 비록 대부분 조선시대의 것이기는 하지만 고령군 쌍림면과 합천군 야로면·묘산면·가야면 일대의 동일 수계를 중심으로 집중되어 있다는 특징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현재의 묘산면과 가야면 및 야로면 지역을 철 생산이란 하나의 공통분모로 묶어 볼 수 있으며, 이 지역들이 모두 동일 수계 상에 위치한다는 측면에도 하나의 지역 단위로 파악할 수 있다. 이들 지역은 야로를 중심으로 대략 반경 10㎞ 범위 내에 포함된다. 이 같은 지리적인 상황은 1872경(고종 9)에 편찬된 『영남읍지(嶺南邑誌)』 지도에도 잘 나타나 있다.
제철에 가장 필수적인 것이 원료와 연료라고 할 때 대부분은 이 두 가지 요건을 기본적으로 충족하는 입지를 택하여 조업이 이루어진다. 연료와 원료의 공급과 생산물의 운송 등에서 가장 경제적인 접점에서 제철 조업이 결정된다면 가야산을 중심으로 남쪽으로 발달한 산지나 계곡에서 분명히 철광석이나 사철의 채광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지역에는 가야산에서 시작하여 우두산-비계산-오도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와, 가야산에서 가산-미숭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있다.
크게 보면 이 두 갈래의 산줄기 사이에 모든 유적이 집중되어 있고, 그 계곡의 유수가 고령을 거쳐 낙동강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고려시대의 제철 유적은 물론 8세기 중엽의 ‘야로’를 확인하는 일도 이 일대에서 가능할 것으로 보이며, 나아가 대가야의 철 생산 유적이 있다면 그 또한 분명히 이 지역을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더욱이 이 지역에는 대가야시대의 고분과 산성이 곳곳에 분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가야면의 매안리에 가야비(加耶碑)가 전해 오는 등 고대로부터의 많은 유적이 분포하고 있어 더욱 기대가 되는 곳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