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00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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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護國-佛心-開經浦-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개진면 개포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동락 |
[개설]
현재 해인사에 소장되어 있는 ‘강화경판 고려대장경(江華京板 高麗大藏經)’[일명 강화경판]은 13세기 중반 몽고의 침략으로 야기된 민족적 수난기에 피난 수도였던 강화경(江華京)에 설치된 대장도감(大藏都監)에서 조성되어, 1236년(고종 23)부터 1251년(고종 38)까지 16년간에 걸친 공역으로 이루어졌다. 강화경판이 강화도에서 해인사로 이운된 시기에 대해서는 고려 말기 설[1318~1381년], 조선 전기 설[1384~1306년], 조선 태조 7년 설[1398년], 세조 초인 1456년 설 등 여러 이견들이 있다. 또, 이운 과정에 대해서도 해로와 수로, 육로의 이동 경로와 관련한 다양한 의견이 있다. 그러나 고령의 개경포를 거쳐 해인사로 옮겼다는 것에는 대체로 동의하고 있다.
개경포는 일찍이 낙동강의 수운을 이용한 교통의 요지로서 포구로도 매우 번성한 곳이었다. 나루의 이름도 처음에는 가혜진(加兮津) 혹은 가시혜진(加尸兮津)으로 불리다가, 이후 개산포(開山浦)·개산강(開山江) 등으로 불렸다. 그러다가 조선 전기 강화경판의 이운과 관련해 개경포(開京浦), 즉 장경나루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개경포는 고려시대 민족적 수난기에 조성되었던 호국의 불심을 강화도에서 해인사로 옮긴 징검다리 역할을 한 곳인 셈이다.
[개경포는 고대부터 교통의 중심지였다]
개경포는 개진면 개포리 앞의 낙동강 변에 위치한 나루이다. 이 나루는 선사시대부터 고령 지역에서 낙동강을 이용해 외부 지역과 교통하는 수로 교통의 요충지였다. 이후 반로국(半路國), 곧 대가야시대를 거치면서 대외 교역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더욱 활발하게 활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562년 신라 진흥왕은 대가야를 멸망시킨 후 고령 지역에 대가야군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그 관할 하에 적화현[합천 야로 일대]과 가시혜현[고령 우곡면과 개진면 일대]을 두었다. 개경포는 가시혜현에 속한 나루였던 것으로 보인다.
개경포가 역사 자료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644년(선덕여왕 13) 무렵이었다. 즉, 신라와 백제가 치열하게 전쟁을 벌이던 644년 신라가 백제에게 빼앗겼던 낙동강 변의 “가혜성(加兮城)[고령군 우곡면 일원] 등 7개 성을 다시 되찾고 가혜진을 열었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 김유신 열전의 내용이 그것이다. 여기서 가혜성은 우곡면의 도진리산성, 가혜진은 현재의 개경포로 비정된다.
이후 661년(태종무열왕 8)에는 신라군이 낙동강을 건너는 나루로 가시혜진이 다시 나온다. 가시혜진은 가혜진과 동일한 곳으로, 가시혜현에 있는 나루터였음을 잘 보여 준다. 이후 가시혜현은 757년 신복현(新復縣)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940년(태조 23)경 현이 없어지고 고령군에 속하게 되었다. 하지만 고려시대에도 개경포는 낙동강의 주요 나루로 활용되고 있었다.
이후 조선 태조 때 강화도의 선원사(禪源寺)에 보관 중이던 ‘강화경판 고려대장경’을 개경포를 통해 해인사로 이운한 후 개경포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1530년(중종 25)에 증보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비롯한 조선시대의 지리지나 읍지, 고지도 등에는 개경포를 ‘개산강’ 혹은 ‘개산포’로 수록하고 있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는 개경포의 공식 명칭이 ‘개산강[포]’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고령군 개진면 개포리에 위치한 개경포는 선사시대 이래 근대에 이르기까지 낙동강의 주요 나루터였다. 대가야에서 조선시대 이전까지는 주로 가혜진으로 불렸고, 조선시대에는 개산강[포]으로 불렸다. 또, 조선 전기 강화경판이 이운되면서 개경포로 불리기도 했으나 현재는 ‘개포나루’ 혹은 ‘개경포[장경나루]’라는 이름이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강화경판 고려대장경의 이운과 개경포의 역할]
1. 강화도에서 해인사까지
1236년 공역을 시작하여 1251년 판각이 완료된 강화경판은 처음에 강화도의 선원사에 봉안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강화경판은 여말선초 왜구의 침략에 대비해 해인사로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강화경판이 해인사로 이운된 시기에 대해서는 앞서 말한 대로 여러 이견이 있으나, 이들 주장들은 모두 강화경판을 강화에서 해인사로 이운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한다. 이와 달리 강화경판이 처음부터 해인사와 그 인근 지역에서 판각되어 해인사에 보관되었다는 견해가 제시되기도 하였다.
해인사로의 이운 과정에 대해서도 해로와 수로, 육로의 이동 경로와 관련한 다양한 의견이 있다. 즉, 육상 운송은 태조 7년 설을 따를 경우 강화도→지천사[한강]→충주[남한강]→문경새재[문경]→낙동강→개경포→해인사로 이동했을 것으로 본다. 반대로 해상 운송의 경우 강화도 선원사 혹은 지천사에서 조운선에 경판을 싣고 서해→남해→부산[김해]→낙동강→개경포로 이동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이동 경로에 대한 여러 견해들도 결국 강화경판이 고령의 개경포를 거쳐 해인사로 옮겼다는 것에는 대체로 동의하고 있다.
2. 개경포에서 해인사까지
개경포에서 해인사까지의 경로는 세 가지로 상정된다. 개경포에서 동쪽으로 열뫼재라는 작은 고개를 넘으면 회천을 따라 신안리, 반운리, 양전리를 거쳐 대가야읍으로 들어오는 평지길이 이어진다. 대가야읍에서 북동쪽으로 가면 덕곡면을 거쳐 옥계리 모로고개를 넘으면 야로면의 하림리로 이어진다. 하림리는 지금도 해인사로 진입하는 도로가 나 있는 길이다.
다음으로 대가야읍으로 진입하기 전 고아리에서 안림천을 따라 쌍림면의 반룡사가 있는 용동 방향으로 올라간다. 이곳에서 미숭산 아래의 고개를 넘으면 야로면의 나대리가 나온다. 이곳 역시 해인사의 진입로로 이어진다. 마지막으로는 대가야읍에서 국도 26호선을 따라가는 길이다. 쌍림면의 신촌리를 거쳐 야로면 덕암리를 거쳐 해인사로 진입하는 통로이다. 현재로서는 이 중 어떤 길을 택했는지 선뜻 판단하기는 어렵다.
해인사 대적광전의 벽화에는 대장경판을 이운하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이 언제 그려진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소달구지뿐만 아니라 남자는 지게를 지고 여자는 머리에 이고 대장경판을 옮기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합천군에서는 매년 10월에 팔만대장경축제를 개최하고 강화경판의 이운 과정을 재연하고 있다. 관광객들과 승려들이 참여하여 우마차, 지게, 봇짐, 등짐, 머리짐 등을 통해 고령의 개경포에서 해인사 장경판전까지 강화경판을 이운하는 과정을 재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민족적 수난의 시기에 세계문화유산이자 나라의 대보(大寶)인 강화경판을 조성한 고려인의 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강화경판 고려대장경은 어떻게 판각되었을까?]
대장경[一切經, 藏經, 三藏經]은 보통 한자로 번역한 불교 정전의 총서를 일컫는다. 대장경은 부처의 말을 담은 경장(經藏), 제자들이 지켜야 할 계율을 담은 율장(律藏), 경과 율에 대한 주석을 담은 논장(論藏)의 삼장을 집대성한 것이다. ‘장(藏)’은 ‘바구니’를 의미하므로, 경·율·논의 3장을 담은 바구니란 의미로 풀이할 수 있다.
현재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는 강화경판은 경판의 수만 8만 장이 넘는다. 경판 한 장의 두께가 4㎝ 정도이니, 이를 쌓아 놓으면 4×8만=3,200m로 백두산보다 더 높다. 서로 이으면 70㎝×8만=56㎞[140리], 무게로는 3.4㎏×8만=280톤이 된다. 또 경판 한 장에 300여 자 이상이 새겨져 있어 전부 합하면 5,200만 자가 된다. 이를 모두 읽으려면 하루 8시간 동안 500자 정도를 읽는다고 가정할 때 최소 30년 이상이 걸린다고 한다.
이처럼 방대한 분량의 목판이 근래에 만든 것처럼 온전히 전해져, 인쇄술의 극치, 세계의 불가사의라는 찬사를 받고 있는 강화경판 고려대장경은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32호로 지정되었으며, 1995년 12월에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또한 2007년에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어 세계의 ‘표준 대장경’으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이처럼 강화경판 고려대장경은 민족 수난의 시기에 완성된 인쇄 문화의 정수로, 민족 자긍심의 상징으로 자리하고 있다.
1. 강화경판은 어떤 나무로 만들었을까?
강화경판은 나무 위에 인쇄가 쉬운 돋을새김을 원칙으로 하여 도장처럼 글자가 거꾸로 새겨져 있다. 경판 모양은 직사각형으로, 글자가 새겨진 몸체와 손잡이에 해당하는 마구리로 이루어진다. 마구리를 포함한 길이는 대부분 68~78㎝이며[78㎝가 가장 많다], 너비는 24㎝, 두께는 2.8㎝, 무게는 평균 3.4㎏ 정도이다. 흔히 사용하는 컴퓨터 자판보다 1.5배 정도 더 크고 두껍다.
경판에서 실제 글자가 새겨진 부분은 가로 51㎝, 세로 22~23㎝ 정도이다. 글자는 대부분 가로 23줄, 세로 글자 수는 14자이다. 따라서 경판 한 장에 새긴 글자 수는 한쪽 면 322자, 양면을 합해 644자이다. 전체 81,258매를 곱하면 약 5,200만 자 전후이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전체 글자 수가 약 5,600만 자라고 하니, 그에 약간 모자란다.
글자 한 자의 크기는 가로×세로 1.5㎝ 정도로 대체로 40포인트 크기이며, 한 획의 두께는 약 1.5㎜이다. 글자의 새김 깊이는 평균 2㎜ 정도이다. 이 정도의 글자 크기와 획 두께, 새김 깊이는 목판에서 글자가 떨어지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라고 한다.
10여 년 전 강화경판 244매에 대한 수종 분석이 있었다. 그 결과 경판은 산벚나무 135장[64%], 돌배나무 32장[15%], 거제수나무 18장[6%]과 그 외 층층나무, 고로쇠나무, 후박나무, 사시나무 등으로 밝혀졌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경판을 만든 나무는 대부분이 산벚나무와 돌배나무로, 전체의 80%를 차지하고 있다. 비록 표본 조사라고 해도 거제도에서 베어 온 자작나무로 강화경판을 만들었다는 통설은 잘못된 상식임이 밝혀졌다. 산벚나무는 세포와 재질상 경판을 새기기에 알맞은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쉽게 눈에 띄고 전국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돌배나무 역시 마찬가지라고 한다.
2. 강화경판 고려대장경은 어떻게 완성되었을까?
1) 판각 수량
강화경판에 대해 『고려사(高麗史)』 고종 38년(1251) 9월 조에 아래와 같은 내용이 전한다. “왕이 강화성의 서문 밖에 있는 대장경판당(大藏經板堂)에 행차하여 백관을 거느리고 분향하였다. 현종 때 판본이 임진년[1232년(고종 19)]의 몽고 군사 침입 때 불타 버렸다. 임금과 군신은 다시 발원하여 도감을 설립하여 16년 만에 공역을 끝냈다.”
강화경판은 1236년(고종 23)에서 1251년(고종 38)까지 16년에 걸쳐 완성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도감은 대장도감과 분사대장도감을 말한다. 실제 강화경판의 각 권 마지막에는 정유[1237년], 무술, 기해, 경자, 신축, 임인, 계묘, 갑진, 을사, 병오, 정미, 무신, 경술, 신해[1251년] 등의 간기가 있어 조성한 연도를 알 수 있다. 〈표-1〉에서 보는 바와 같이 1237년(고종 24)에서 1251년(고종 38)까지, 1249년(고종 36)을 제외한 시기에 걸쳐 있다.
연도별 판각 수량도 크게 차이가 있다. 그 중 1243년(고종 30)에서 1245년(고종 32)의 3년간 판각 수량이 가장 많아서, 전체의 50% 이상을 차지한다. 1243년부터 분사도감의 판각이 시작된 것과 함께 경판 판각 체계가 자리 잡은 요인 등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경판이 집중적으로 산출된 것은 1237~1248년의 12년이 된다. 그런데 1238년(고종 25)의 수량은 그 전후 연도와 비교해 보면 2~4배 이상에 달한다. 이 해는 몽고군이 경주의 황룡사에 이르러 9층 목탑과 장육불상 등을 모두 불태웠던 시기이다. 몽고 침략이 격심한 때에 오히려 더 많은 경판이 판각되었던 것은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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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조성 과정
강화경판을 만드는 데 소요되는 나무는 얼마나 되었을까. 경판은 몸체와 마구리로 나눌 수 있다. 몸체의 길이는 64~74㎝ 정도로, 전체 부피는 384㎥, 마구리는 경판당 2개로 양쪽을 합쳐 62㎥이다. 이를 합치면 446㎥ 정도이다. 이를 차곡차곡 쌓으면 사방 10m, 높이 4.46m에 달한다. 경판 전체의 무게는 3.4kg×8만=약 280톤이다. 4톤 트럭 70대, 10톤 트럭 28대 분량이 된다. 한편, 경판 판재와 마구리를 만드는 데 필요한 목재는 전체 통나무의 50%를 넘을 수 없다. 따라서 대장경판을 만드는 데 필요한 전체 통나무의 부피는 작게는 1,000㎥, 많게는 4,000㎥ 이상이 필요하다.
실제 경판의 길이는 평균 68㎝이므로 벌목 후 통나무 토막을 낼 때는 1m 정도 되어야 한다. 보통 산벚나무나 돌배나무는 나무의 특성상 한 그루에 1.5개 정도를 얻을 수 있다. 또 경판의 평균 너비가 24㎝, 두께가 2.8㎝이므로 처음 원목을 켤 때는 적어도 너비 30㎝, 두께 5㎝는 되어야 한다. 이렇게 보면 원목의 굵기는 지름이 40㎝ 이상은 되어야 한다. 만약 지름 40㎝ 이상인 원목을 벌채해 경판을 만든다면, 한 그루당 채취 가능한 판자 수는 2장이므로[8만÷2÷1.5] 약 2만 7천 그루, 50㎝면 9,000그루, 100㎝라면 1,400그루 정도가 필요하다. 즉, 지름 50㎝를 평균으로 잡아 실제 벌채된 나무의 수를 계산하면 1만~1만 5천 그루가 필요하다. 1만 그루의 나무를 베는 데 필요한 인력은 어느 정도이며, 또 운반하는 데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필요했을까. 강화경판을 판각하는 과정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나무 골라내기→나무 베기와 가져오기→판자 켜기→새김판자 준비→판자 말리기→새김 판자의 마무리 가공→마구리 만들기→경판에 글자 새기기→완성 경판 옻칠하기
이상과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강화경판은 완성되었는데, 물론 여기에서 언급되지 않는 과정도 많다. 즉, 벌목에 필요한 각종 도구와 한지·먹·붓 등 판하본의 제작에 필요한 재료, 조각칼과 풀, 옻 등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운 소모품과 도구가 필요하다.
[강화경판은 왜 만들었을까?]
강화경판이 조성되던 시기는 반몽 항쟁기였다. 당시 몽고는 아시아 대륙을 거의 석권한 막강의 정복 국가였으며, 이들의 침략에 직면한 최씨 무인 집권자인 최우(崔禹)는 강화도로 천도를 단행해 버린다. 육지에 남겨진 일반 백성들은 이제 자신의 손으로 삶의 터전을 지켜야만 했다. 이러한 분위기를 반전하기 위한 사업이 강화경판의 조성이었다.
이규보가 펴낸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의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版君臣祈告文)」에는 강화경판의 조성 동기가 잘 나타나 있다.
1. 임금은 태자와 재상을 비롯한 문무백관과 더불어 목욕재계하고 향을 피우며……[이하 중략]…… 몽고군이 우리에게 가한 잔인하고 흉포함은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망나니를 다 모아 놓았다 하겠으며 금수보다도 더 혹심합니다. 그러니 어찌 천하가 다 존경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는 줄 알리가 있겠습니까. 몽고군의 더러운 말발굽이 지나는 곳마다 불상과 불경은 모두 불살라 없애고, 부인사에 소중히 모셔 두었던 초조대장경판도 이들의 마수에 걸려 하나도 남은 것 없이 재가 되었습니다. 윗대로부터 이어온 수십 년의 공적이 하루아침에 없어지고 나라의 큰 보배[國之大寶]를 순간에 잃고 말았습니다. ……[이하 중략]…… 이 귀중한 보배를 잃어버렸는데 어찌 감히 공사가 거창할 것을 두려워 다시 만드는 것을 망설이겠습니까. 이제 여러 재상 및 문무백관 등과 함께 큰 소원을 세우고 주관하는 관청에 요원을 배치하여 공역을 시작하였습니다.
2. 처음 대장경을 새기게 된 연유를 살펴보면, 현종 2년[1011년]에 거란군이 침입하여 난을 피해 남쪽으로 갔으나 거란군은 송악에 머물면서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이에 임금과 신하가 합심하여 대장경을 새기기 시작했더니 거란군이 물러갔습니다. 생각건대 대장경은 예나 지금이나 오직 하나이며 새기는 것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임금과 신하가 합심하여 발원함 또한 마찬가지이니 어찌 그때만 거란군이 물러가고 지금의 몽고군은 물러가지 않겠습니까. 다만 모든 부처님과 제천의 보살핌이 한결같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제 지성을 다해 대장경판을 다시 새기는 것은 그때의 정성에 비해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모든 부처님과 성현 및 삼십삼천께서 이 간절한 기원을 들으시고 신통의 힘을 내려 주십시오. 저 추악한 오랑캐 무리의 발자취를 거두어 멀리 달아나 다시는 이 강토를 짓밟지 못하게 해 주십시오. ……
「대장각판군신기고문」에서는 “오랑캐에 의해 나라의 대보(大寶)인 부인사의 대장경판이 소실되었다. 현종 때 거란의 침략이 있을 때도 대장경을 조성하여 물리칠 수 있었으니 몽고군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고 강화경판의 조성 동기를 밝히고 있다. 고려 사람들에게 나라의 대보인 대장경판은 문명의 구체적인 재산이었다. 고려인이 본 몽고는 침략자인 동시에 문명의 파괴자였다. 따라서 당시의 반몽 항쟁은 이민족의 침략으로부터 조국을 지키고, 야만으로부터 문명을 수호하는 것이었다.
또한 위로는 국왕과 왕실, 귀족 관료층으로부터 아래로는 일반 민중에 이르기까지 전 계층이 갖고 있었던 불력을 통한 소재의 염원을 담고 있었다. 특히, 반몽 항쟁기 고려인들의 경판 사업에의 참여는 보리심의 발로요, 불심(佛心)의 상징이었다. 고려 사람들에게 불심은 단순히 부처에 대한 숭앙심에 국한한 것이 아니라 삶의 방법이요, 생활 그 자체였다. 이들의 적극적인 현실 참여를 통한 위기 상황의 극복 노력은 결국 반몽 항전의 에너지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몽고 병사들이 1232년 부인사의 초조대장경을 불사르거나, 1238년 경주의 황룡사 구층목탑을 불사른 것은 바로 반몽 항전의 원동력을 제거하기 위한 목적이었던 셈이다.
당시 반몽 항쟁의 주요 전략 전술은 청야전(淸野戰)[사기가 저하된 적이 후퇴할 때 적에게 타격을 줘 승리를 일구는 것]과 수성전(守城戰), 유격전(遊擊戰) 등이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판각 사업에 우리의 상상을 뛰어 넘는 많은 민중이 참여함으로써 청야전에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한편으로 성공적인 사업 진행은 고려군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키는 반면, 몽고군에게는 심리적 압박 요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상주 함창현[현 경상북도 상주시 은척면 황령리]에 있는 황령사(黃嶺寺)의 홍지(洪之)는 1254년(고종 41) 상주산성에서 몽고군을 물리치는 데 앞장선 승려였다. 그는 1238~1939년 동안 모두 37장의 강화경판을 대장도감에서 판각하였다. 그는 몽고의 3차 침입 때는 대장경 판각에, 6차 침입 때는 직접 몽고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두었다. 그에게 있어 대장경 판각과 반몽 항쟁은 동일한 의미였던 것이다.
[강화경판은 누가 만들었을까]
강화도로 천도를 단행한 최우는 강화경판의 조성을 통해 민중의 돈독한 불심을 자극해 민심을 하나로 모을 수 있다고 판단한 듯하다. 하지만 자신이 전면에 나설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이것은 ‘세고려국대장도감봉칙조조(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彫造)’라는 강화경판의 간기에서도 잘 나타난다. 중국의 연호가 아니라 12간지를 따르고 고려국을 명시한 후 황제의 명을 받들었다는 ‘봉칙조조’를 사용하고 있다. 이 점은 고려인들의 자긍심과 자주성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사업의 상징적인 주체가 고려국왕임을 천명한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대장각판군신기고문」에서 “왕을 비롯한 여러 재상 및 문무백관 등과 함께 큰 소원을 세우고 주관하는 관청에 요원을 배치하여 공역을 시작하였습니다.”고 하여, 전 국가적인 차원의 공역임을 대내외적으로 천명하였다. 즉, 강화경판의 조성은 고려의 전 국가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대사업이었다. 강화경판은 고려 국왕을 정점으로 범국가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 거사(鉅事)였다.
이 사업에는 최씨 무인 집정자인 최우와 최항(崔沆) 등을 중심으로 문무 관료층은 물론 정안(鄭晏)과 같이 낙향해 있던 관인들도 적극 참여하였다. 요컨대 최씨 무인 정권의 집정자나 정안 등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 사업이 아니었던 것이다. 따라서 강화경판을 제작하기 위해 국가적인 차원의 정책 수행 기구인 대장도감을 신설하여 정책적인 면을 총괄하고, 그 하부에 실무 기능을 담당할 부서를 통해 업무를 추진케 하였다. 이 과정에서 지방 통치 기구를 적극 활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적인 차원에서의 지원만으로 강화경판을 완성할 수는 없었다. 국왕과 최씨 집정자, 재조 관료층[문무 관료층]을 위시한 문인 지식인층, 재향 세력, 승려층 등과 함께 대다수의 민중들이 참여했기 때문에 국가적인 대사(大事)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고 하겠다.
1. 강화경판을 만든 사람들
강화경판은 16년 동안 총 1,513종 6,807권, 8만 280매, 16만 560장의 경판으로 각성되었다. 이들 각각의 경판 중 변계선 안팎 여백에 참여 사실을 밝혀 놓은 각성자는 총 27,444명으로 조사되었다. 이들을 각 연도별로 구분하여 동일인으로 재분류해 보면 14년간 연인원 5,667명이 참여한 것으로 파악된다. 도감별로는 대장도감에서 3,154명, 분사도감에서 1,807명, 간기가 없는 경판에서 707명이 조사된다. 이를 토대로 각성인의 인명 표기 형태를 동일인, 이자체, 동명이인 등으로 재분류해 분석한 결과 각성인은 총 1,759명으로 나타났다. 이를 표로 제시해 보면 〈표-2〉와 같다.
강화경판은 1243년 이전에는 대장도감에서만, 그 이후에는 대장도감과 분사도감의 양 도감에서 이원 체제로 운영되었다. 강화경판 6,807권을 도감별로 분류 조사해 보면 각성 사업 초기에는 권별 분담 방식과 공동 작업 방식으로 이원화되어 진행되다가, 분사도감에서 각성 사업이 시작되면서 공동 작업 방식으로 사업 운용이 변화되고 있었다. 이에 따라 각성 참여자도 1243년까지는 총 1,314명이 참여한 데 비해, 그 이후에는 대장도감에서 1,836명, 분사도감에서 1,798명이 참여하여 분사도감의 전체 판각량에 비해 각성인의 참여가 많아졌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들 각성인들의 참여 추이를 살펴보기 위해 1,759명을 각 기간별로 구분하여 표로 그려 보면 〈표-3〉과 같다. 강화경판 각성 16년 동안 계속 참여한 각성자는 아무도 없으나, 최장 12년간 참여한 각성인은 김승(金升)이란 사람으로, 12년간 무려 772장을 판각하였다.
우선, 1년에서 5년 미만으로 참여한 각성인은 약 1,500명으로 전체의 80%를 차지하고 있다. 즉, 80% 정도의 사람이 단기간에 참여한 사람들이라면 각성 사업의 인적 자원인 각성인들의 참여 및 활동이 매우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음을 말해 주며, 강제적인 동원 체제가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5년 이상 참여하거나 각성량이 150장 이상을 차지하는 사람은 대략 170여 명 정도인데, 약 41,900여 장을 각성해 전체 경판의 1/4에 해당하는 분량을 차지하였다.
이들 170여 명은 상당한 수준의 판각 능력을 지닌 전문 각수로 보이는데, 강화경판 각성 이전부터 사원 등에서 활동하던 인물들로 보인다. 이들이 중심이 되어 강화경판의 판각 사업이 진행된 것으로 여겨진다. 즉, 이들은 각성 활동에 새롭게 참여한 각성인들에게 모범을 보이면서 교육의 역할까지도 수행했을 것이다. 이들이 정점이 되어 단계별 분업 과정을 거쳐 경판을 완성하고, 재교육을 통해 다시 전문 각수를 양성하는 체제를 구축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전문 각성자 중 500장 이상을 판각한 사람은 방수(方守), 세진(世眞), 사중(思中), 삼며(三㫆), 자룡(子龍), 김승(金升) 등 6명이다.[방수: 1238~1246년 9년간 대장도감 521장, 세진: 1237~1243, 1245~1246년 9년간 대장도감 439장, 사중: 1237~1247년 11년간 대장도감 500장, 삼며: 1237~1237년 11년간 양 도감 527장, 자룡: 1238~1248년 11년간 양 도감 502장, 김승: 1237~1238년 12년간 양 도감 772장]
보통 전문 각수의 경우 경판 1장을 새기는 데 10~20일 정도 걸리므로, 1년에 30장 내외를 조성할 수 있다. 그러면 12년 동안 360장 내외가 되지만, 김승의 경우 770여 장을 판각하였다. 아마 보조 각수의 도움으로 각성하는 양이 많아졌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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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강화경판 조성의 참여 형태
강화경판의 각각의 경판은 각계각층의 보시로 조성되었다. 특히 경판의 변계선에 나타나는 1,760명의 인명을 통해 각성 활동 참여자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알 수 있는데, 먼저 경판을 조성하기 위해 이루어진 보시와 관련한 몇몇 사례를 살펴보기로 한다.
1) 신녀견덕행위부모(信女堅德行爲父母), 신녀계환행위부모(信女戒煥行爲父母), 신녀만덕행위부모(信女萬德行爲父母), 신녀김씨위부모(信女金氏爲父母), 신녀보당위부모(信女普幢爲父母), 신녀연지행위부모(信女蓮池行爲父母), 신녀정월행위부모(信女定月行爲父母)[『대반야바라밀다경』 및 『불설비밀삼매대교왕경』]
2) 사미 보호당 영기 복위무보(沙彌 甫湖堂 永奇 伏爲父母), 비구 대운당동고(比丘 大雲堂 東皐), 사미 백우 위부모(沙彌 白藕 爲父母)
3) 각수 최정균(刻手 崔丁均), 동백 각(東伯 刻)
4) 충주 천균 각, 충주 영수 각[忠州 天均 刻, 忠州 永守 刻]
5) 조각 계안(彫刻 戒安), 손장 각(孫璋 刻), 김대명 각(金大命 刻), 각 대명(刻 大命)[이상 『대반야바라밀다경』]
6) 요원수(了源手) 천태산인(天台山人) 요원수(了源手) 삼십구폭(三十九幅), 뇌자공덕력(賴玆功德力) 영탈윤회보(永脫輪廻報) 엄부여자당(嚴父與慈堂) 우유극락향(優遊極樂鄕) 요원지(了源誌)[『방광반야경』 및 『대방등대집경』]
7) 명각심(明覺心), 명각심작(明覺心作), 명각수단심(明覺手段心), 명각수단심공(明覺手段心工)[『대방등대집경』]
위의 자료들은 16만 장 이상의 경판 중 자신의 역할을 표기해 놓은 일부 자료들을 제시해 본 것이다. 1)의 ‘신녀’는 귀족 관인층의 부인으로 보이며, 2)의 사미·비구·6) 천태산인 등은 승려임을 알 수 있다. 다만 3)~5)의 경우는 정확히 신분을 알 수 없으나, 성씨가 있거나 충주라는 지역을 표기해 놓은 것으로 보아 문인 지식층 혹은 향리층[재향 세력]으로 추정된다. 이 중 1)과 2)는 재물을 보시했던 사람, 3)~5)는 직접 판각 작업에 참여했던 사람으로 볼 수 있을 듯하다.
그러나 강화경판의 경우 재물 보시와 몸 보시로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6)의 천태산인 요원이 그런 경우이다. 그는 『방광반야경』 권7에서 5~18장은 ‘요원수(了源手)’로, 그리고 마지막 39장에서는 ‘요원지(了源誌)’로 표기해 놓았다. 그런데 『방광반야경』 권7에는 요원 외에도 계진(桂眞), 양백(楊白), 원경(元卿) 등의 이름이 함께 새겨져 있다. 따라서 ‘요원수’는 자신이 직접 경판을 조각했다는 각수의 뜻이라면, ‘요원지’는 ‘총 39폭의 경판을 기진(寄進)하였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대방등대집경』 권3의 제34장 말미에 있는 간기에는 “뇌자공덕력영탈윤회보엄부여자당우유극락향요원지(賴玆功德力永脫輪廻報嚴父與慈堂優遊極樂鄕了源誌)[이 공덕의 힘으로 영원히 윤회의 업보에서 벗어나고 부모님께서 극락에서 즐겁게 사시길 기원합니다]”라는 글귀가 있다. 그 외의 나머지 장에서는 요원(了元)으로 새겨 놓았는데 동일인으로 보인다. 즉, 그는 『대방등대집경』 권3을 직접 새기고 또 경판을 기진키도 했던 것이다.
이상에서처럼 강화경판에 새겨진 인명들은 각수[몸 보시]와 기진 자[재물 보시]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기에, 이를 통틀어 ‘각성 활동(刻成活動)’으로 파악할 수밖에 없다. 다만 조각(彫刻), 도(刀), 각(刻), 각자(刻者) 등을 밝힌 경우는 각수로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음 7)에서와 같이 심(心), 심작(心作), 수단심(手段心), 수단심공(手段心工) 등의 표현은 “온 마음을 다해 경판을 조성하였다.”는 표현으로, 당시 강화경판을 각성한 사람들의 자부심을 알 수 있게 한다.
3. 강화경판 각성에 참여한 계층
강화경판의 경판 변계선 안팎에 각인된 2만 7천여 명의 명단은 단순히 각수의 명단만은 아니다. 이것은 경판의 각성 사업에 참여해서 활동한 일체의 행위, 즉 문필 활동과 판각, 경판 조성의 경비 기진 등을 모두 포괄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들 각성자의 명단에서는 일반 민중들의 참여 사실을 정확하게 확인하기는 어렵다. 이들은 역사의 전면에 자신의 이름을 직접 남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각성자의 명단 중 산동(山同), 말동(末同), 사동(士同), 최동(崔同), 박동(朴同) 등은 일반 민중으로 추정되는 인물들이다. ‘모동(某同)’이란 명칭이 ‘총각’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산동: 1243~1244년 2년 32장, 대장·분사 양 도감, 말동: 1243년 1년 12장, 대장·분사 양 도감, 사동: 1241~1245년 5년 104장, 대장·분사 양 도감, 최동: 1243~1248년 6년 130장, 대장·분사 양 도감, 박동: 1243~1244년의 2년 80장, 대장·분사 양 도감]
이들은 재향 세력인 향리층의 지휘를 받은 지방군의 일원으로 강화경판의 조성 사업에 동원되었거나, 지방 사원과 관련을 가지면서 사원을 통해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다. 향후 이들의 존재에 대해 심도 깊은 연구가 진척될 필요가 있다. 여기서는 강화경판의 각성 활동에 참여한 계층을 재조 관료와 재향 세력, 그리고 승려층, 국자감시 출신의 문인 지식인층 등의 사례를 통해 살펴보기로 한다.
1) 재조 관료층
강화경판은 국왕을 비롯해 문무백관이 서원을 발해 조성될 수 있었다. 그와 함께 최씨 무인 정권의 최우와 최항을 비롯해 정안, 전광재 등 관료층들의 활동을 『고려사』 등 당시의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와 함께 강화경판에 직접 자신의 신분과 이름을 기록해 둔 신녀 견덕·계환·만덕·김씨·보당 등은 귀족 관인층의 부인으로 추정된다. 더불어 강화경판의 인명을 『고려사』 등에 남겨진 재조 관료층과 서로 비교해 보면 여러 인물들이 더 찾아지는데, 그들은 평장사 최홍윤(崔洪胤), 추밀원사 박문비(朴文備), 비서감 김효인(金孝仁), 대장군 김광려(金光呂), 대장군 선대유(鮮大有), 전라도안찰사 최종유(崔宗裕), 좌창별감 왕중선(王仲宣) 등 39명이다.
2) 재향 세력
강화경판의 각성자 중에는 재향 세력인 호장(戶長)·대정(隊正)과 같은 향리층들이 나타난다. 호장중윤 김연(金鍊), 호장 배공작(裵公綽), 호장 윤홍(尹弘)[또는 允弘], 대정 허백유(許白儒) 등이 그들이다.[호장중윤 김연: 1243~45년 3년, 대장·분사 양 도감 73장, 호장 배공작: 1243~44년 2년, 대장·분사 양 도감 137장, 호장 윤홍: 1241~44년 4년, 대장·분사 양 도감 201장, 대정 허백유: 1237~38년 2년, 대장도감 40장]
한편, 대장경에서는 자신의 출신지를 밝힌 경우도 있는데, ‘충주 천균 각(忠州 天均 刻)’, ‘충주 영수 각(忠州 永守 刻)’이 그 사례이다. 이들은 아마 충주 지역 출신으로 자신의 본관을 표기했거나, 아니면 충주 지역에 대한 자긍심이 남달랐던 인물로 보인다.[충주 천균(天鈞): 1238~1239·1243년 3년, 대장도감 51장, 충주 영수(永守): 1238~1239·1244년 3년, 대장도감 76장]
3) 승려층[학승]
강화경판의 조성에는 많은 수의 승려층이 참여하고 있었다. 현재 정확하게 그 숫자는 알 수 없지만 전체의 40%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경판 각성자 중 승려의 비중이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
먼저 『고려국신조대장교정별록(高麗國新彫大藏校正別錄)』에는 ‘사문 수기 등 봉칙교감(沙門 守其 等 奉勅校勘)’이라 하였고, 그 외에도 천기(天其) 및 그의 제자, 비구 천단(天旦)과 서룡사(瑞龍寺)의 선사 연공(連公) 등이 확인된다. 그리고 강화경판에는 사미 영기(永奇)·백우(白藕), 비구 동고(東皐) 등을 비롯해 천태산인 요원 등과 같이 자신이 승려임을 밝혀 놓은 경우가 많다.[천태산인 요원: 1237~1241·1243년 6년, 대장도감 84장, 축융산인(祝融山人) 신성(信成): 1238~1240·1242·1244~1245년 6년, 대장·분사 양 도감 71장, 도인(道人) 녹상(祿祥): 1238·1241~1246년 7년, 대장·분사 양 도감 138장, 비구 효겸(孝兼): 1238~1240·1243~46년 7년, 대장·분사 양 도감 151장]
한편, 승려임을 밝혀 놓지는 않았지만 비문이나 문집, 경판 등 각종 불사에 참여한 승려들과 강화경판의 인명을 비교해 동일인으로 보이는 인물이 대략 40여 명 가까이 나타난다.
4) 국자감시 출신의 문인 지식층
강화경판에서 진사 임대절(林大節)과 영의(永義) 등은 자신이 국자감시 출신임을 밝혀 놓았다.[진사 임대절: 1238~1244년 7년, 대장·분사 양 도감 199장, 진사 영의[衣]: 1238·1240·1244년 3년, 대장도감 36장]
이에 강화경판에 새겨진 인명과 『고려사』에 나타난 비슷한 시기의 국자감시 급제자들의 명단을 서로 비교해 보면, 서로 유사한 사람이 17명 정도 확인된다.
이상에서처럼 우리는 각 경판의 변계선 안팎 여백에서 강화경판의 조성 시기에 살았던 사람을 만날 수 있다. 강화경판의 ‘각성 활동’을 하였던 각 계층 중에서 특히 전직 관료를 위시한 품관층과 진사·동정직 소유자·향리 등의 재향 세력, 학승을 위시한 승려층 등은 당시 각 지역 사회를 이끌어 나가던 주도 세력으로 간주된다. 이들은 외적의 침략으로 말미암아 민족적 최대 수난기에 처한 현실을 고뇌하고 위기 상황을 적극적인 현실 참여를 통해 극복하고자 경판의 조성 사업에 참여하였다. 이들의 현실 참여는 실의에 빠진 당시의 수많은 민중들에게 희망을 고취시켜 주는 하나의 활력소가 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강화경판과 관련한 몇 가지 문제들]
1. 명칭
『고려대장경』은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 『해인사대장경(海印寺大藏經)』, 『고려고종관판대장경(高麗高宗官版大藏經)』 등 여러 이름으로 부른다. 먼저, 『팔만대장경』이란 그 판수가 8만여 장으로 8만 4천 번뇌에 대한 법문이 들어 있으므로 이렇게 부른다. 하지만 그 숫자가 8만이 넘으므로, 이것은 일종의 보통명사의 성격을 지닌 명칭이라고 할 수 있다.
『재조대장경』은 고려 현종 때 각판한 것을 『초조대장경』이라 하고, 그 다음 두 번째로 조조했다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다. 이 경우 『고려대장경』의 지속적인 발전 과정에서 의천의 속장경을 비롯한 많은 대장경의 조성 사실이 제외된다. 강화경 시대에 조성된 대장경은 고려 불교의 지속적인 발전의 산물이자, 현종 때의 대장경판 조성 이래 조성의 기능적 향상과 속장경 조성으로 경판 체계의 발전 등을 계승한 대장경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해인사 대장경』은 현재 해인사에서 경판을 보관하고 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그렇다면 그 명칭은 수시로 변경될 가능성이 있다. 즉, 강화경판은 원래 강화에서 왜구의 노략질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해 해인사로 옮긴 것이다. 만약 이곳이 안전하지 못하면 다른 지역으로 옮겨질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때마다 명칭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 때문에 최근에는 ‘강화경판 고려대장경’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는 유사한 명칭과의 구별을 위한 것으로, 강화경은 우리 민족의 수난을 극복·수호하는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고려대장경의 접속어로 명사화하면 상호 역사성을 보완하게 되어 그 의미를 한층 강조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강화경판 고려대장경이라고 할 때 그 조성의 시기와 과정도 동시에 부각되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그 조성 당시에 수도인 강화경에서 새로운 경판 조성 계획이 수립되고 판각의 전체 공역이 지휘·감독되었으며, 또 외침에 굴하지 않는 민족적 자긍심을 느끼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판각 장소
현재 강화경판의 경판 각권의 마지막 끝에는 그 판각 연도와 장소 등을 언급해 두고 있다. 즉, ‘갑진세고려국대장도감봉칙조조(甲辰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彫造)’, 또는 ‘정미세고려국분사대장도감봉칙조조(丁未歲高麗國分司大藏都監奉勅彫造)’ 등이 그것이다. 특히 그 중에는 ‘정미세고려국분사남해대장도감개판’이라 새겨진 것이 있다. 그리고 『고려사』의 고종 38년(1251) 9월 25일 조의 기록, 이규보의 「대장각판군신기고문」, 『동문선』의 「영봉산용암사중창기(靈鳳山龍岩寺重創記)」, 『조선왕조실록』 태조 7년(1398) 5월 10일 조의 내용을 등을 통해 ‘대장도감’은 강화에, ‘분사도감’은 남해에 각각 설치되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대장도감’은 차치하고, ‘분사도감’의 조조 처는 남해의 한 곳에만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분사도감’은 최소한 도 혹은 계수관을 관할 구역으로 설치되었을 것이다. 전광재(全光宰)가 경상도안찰사 겸 분사대장도감의 별감으로 활동했던 것은 그 좋은 예이다. ‘대장도감’ 혹은 ‘분사도감’ 등은 경판의 조성 기구이고, 그 공방―판각의 장소는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든다면 합천군의 해인사, 산청군의 단속사, 남해군의 사원, 가야산의 하거사(下鉅寺), 경주의 동천사 등과 같이 각 지역의 큰 사찰과 기존의 관서 공방 등지에 강화경판의 조성을 위한 새로운 공방을 설치한 것이 그것이다.
3. 강화경판 체제
강화경판의 편성 체제는 크게 내장(內藏)과 외장(外藏)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내장은 『대장목록(大藏目錄)』[K.1405]의 경전을, 외장은 『보유판목록(補遺板目錄)』의 경전을 각각 편성해 놓고 있다. 소위 『초조대장경』―‘국본’에 편입되어 있던 경전은 모두 『대장목록』에 수록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전편―내장으로 편성하고, 또 당시 새로 입장한 경전은 후편―외장의 체제로 삼았다. 이것이 뒷날 『보유판목록』에 수록되었던 것이다.
고려의 대장경은 1011년(현종 2)부터 본격적으로 조성되기 시작하여 1251년(고종 38)에 대미를 장식하게 되었다. 약 2세기 반의 기간에 우리는 세계에서 으뜸가는 찬란한 ‘대장경 문화’를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장경 문화’를 창조하는 과정에서 거란·몽고의 장기간에 걸친 침략과 내정 간섭 등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민족적 수모와 수난을 겪어야만 했다. 우리의 대장경 문화는 민족적 수난의 극복 과정에서 창조된 산물이요 민족적 자긍심의 산실인 것이다.
강화경판의 조성 시기에 이르기까지 정치·경제·사회 분야의 모순 극복과 외세의 퇴치, 그리고 독자 문화의 형성을 위한 이론 개발 및 실천 방안을 창안하기 위한 노력이 부단히 계속되어 왔을 것이다. 강화경판의 편제는 이제까지 불교계의 진보로 축적된 역량을 모두 흡수할 수 있고, 또 미래 지향적인 변화와 정진을 유도할 수 있으며, 나아가 그 산물을 늘 흡수할 수 있도록 창안된 것이다. 현존하는 강화경판의 편제가 바로 그것을 증언해 주고 있다.
‘국본’, 즉 부인사 대장경에 입장된 경전은 제1편―내장으로 편성하고, 또 강화경판을 조성하면서 새로 입장한 경전은 제2편―외장으로 편성한 것이 그것이다. 이 외장에는 강화경판을 조성할 때까지 생성된 경전뿐 아니라 1503년(연산군 9)에 조성된 경판도 편성되어 있다. 따라서 앞으로 산출되는 「경론장(經論藏)」도 제3편, 제4편 등으로 계속 편성하여 나갈 수 있도록 편제하여 놓았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강화경판의 최대 특징인 동시에 하나의 생명체로서 영구적으로 존속할 수 있는 방법인 것이다.
[강화경판의 연구 과제 및 전망]
강화경판에 관한 지금까지의 연구는 주로 뛰어난 교감 작업으로 인해 오탈자가 거의 없다는 점과 경판 자체(字體)의 우수성과 아름다움을 강조하거나, 무인 정권의 정치적 작용으로 인해 완성될 수 있었다는 등 서지학 방면이나 정치적 논리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다. 그 결과 강화경판의 조성 과정에 대한 이해가 현실성에 바탕을 둔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치 않고 지나치게 신비화되거나, 무인 정권의 역할이 과도하게 강조되어 정치적 논리에 치우치고 획일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강화경판은 13세기 당시 세계 대제국인 몽고의 침략이란 대외적 모순과, 정통성이 결여된 무인 정권의 집권기라는 대내적 모순이 중첩된 시기에 완성된 역사적 산물이었다. 이러한 대내외적 모순이 중첩된 민족사의 수난기를 살았던 당대인들은 자신이 살고 있던 현실을 고뇌하고 적극적인 현실 참여를 통해 민족적 수난기를 극복코자 했으며, 그 결과물이 바로 강화경판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의 연구는 강화경판에 대한 지나친 신비화와 획일성을 극복하고, 당대인들의 시대적 고민과 현실 인식, 그를 바탕으로 하는 다양한 참여 양상을 밝혀 현실성과 다양성을 규명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강화경판의 조성은 재조 관료층, 재향 세력과 문인 지식층, 불교 세력 등 당시 사회의 주도층을 중심으로 위로는 국왕 및 왕공 귀족에서부터 아래로는 일반 민중에 이르기까지 전 고려인의 적극적인 현실 참여로 이루어진 산물이란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이들 각성 활동에 참여한 다양한 참여층에 대한 심도 깊은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강화경판의 조성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조성 당시 불교 세력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이 점은 현재 확인되는 1,760여 명의 각성 활동자 중 거의 40~50% 이상이 법명이나 승명을 소지한 불교계의 인물일 것으로 추측되는 것에서도 확인된다. 따라서 앞으로 이들 승려층을 위시한 불교 세력의 각성 활동 참여 사실을 보다 세밀히 분석·종합하고, 그들이 어떠한 제도적 장치를 통해 조직적으로 참여했는가를 구명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강화경판의 조성과 12~13세기 이후 나타나는 불교계의 변화 양상이 어떠한 관련성을 가지며, 고려 불교사의 전개라는 전체적인 틀 속에서 대장경 조성의 역사적 의의를 자리매김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16년이란 오랜 기간에 걸쳐 방대한 인적·물적 자원이 투여되어 조성된 강화경판과 관련된 제반 사실들이, 그 후 원의 정치적 간섭이 가중되는 ‘원간섭기’가 되면서 철저하게 수면 아래로 사라져 버린 사실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다. 사실, 몽고 침략이란 민족적 수난기를 극복하기 위한 반몽 항전의 일환으로 조성된 강화경판이 원간섭기가 되면서 그것이 가지는 상징적 의미로 인해 침묵을 강요당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특히, 강화경판의 조성에 참여했던 광범위한 ‘각성 활동’ 세력들에게는 자신들의 참여 사실이 자랑스러운 전력이 아니라 위험 분자의 낙인이 되었을 것이다. 아울러 원의 간섭이 본격화되면서 강화경판의 각성 활동 참여층 중의 상당수는 원의 정치적 간섭을 반대하는 적극적인 반몽 항전의 전선에 참여했기 때문에, 그에 따른 정치적 박해와 숙청이 뒤따랐을 것으로 추측된다.
현재 강화경판의 각성자 중 몇몇 인물이 삼별초 정부의 주도층에서도 발견된다는 점에서, 그들 중 상당수가 강화경판이 완성된 지 약 20여 년 후에 반개경정부·반몽 항전의 기치를 내걸고 진도와 제주도를 거점으로 항쟁을 계속한 삼별초 정부에도 적극 가담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강화경판의 조성 세력과 삼별초 정부의 주도 세력이 몽고 침략기와 원간섭기로 이어지는 고려 후기 정치사의 흐름 속에 ‘반몽 항전 세력’으로 연결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앞으로의 강화경판에 대한 연구는 경판 조성 과정의 신비화와 정치성이 강조된 일원적이고 단선적인 이해에서 탈피하여, 현실성을 토대로 한 다양성이 밝혀져야 할 것이다. 아울러 고려 불교사의 전개 과정 속에서 차지하는 대장경 조성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 보고, 몽고의 침략과 원간섭기라는 민족적 수난기에 ‘반몽 항전 세력’이 어떻게 대응하고 있었던가를 종합적으로 구명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연구가 보다 심도 깊게 진행될 때 강화경판이 가지는 현재적 의미가 점차 되살아 날 것이다. 750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우리는 강화경판의 조성 과정 전모를 잘 알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