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B04020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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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우성면 내산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최언평 |
선생님이란 호칭을 듣던 때가 벌써 5년 전이다. 지금은 손발에 흙 묻히고 몸에서는 땀 냄새나는 평범한 시골 아저씨의 모습이지만.
대학교를 졸업하고 1992년 우연찮은 기회에 친구와 함께 입시학원을 운영하게 되었다. 돌아가신 아버지도 당시 초등학교 교사셨고 큰 누님과 매형도 교직에 계셨다.
학원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침을 준다는 것이 조금은 부담도 되었지만 그래도 최언평 씨는 알고 있는 지식을 전해 줄 수 있다는 것이 행복했었다. 그래서 ‘딱 10년 동안만 제대로 이 일을 해야겠다’라는 결심으로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 1995년에 결혼을 하였고 다음해에는 예쁜 첫딸도 얻게 되었다.
하지만 곧이어 터진 IMF는 학원가에도 고스란히 여파를 몰고 왔다. 학원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가 하면 문을 닫는 학원들도 부지기수였다. 결국 98년에는 학원의 규모를 줄여 이전할 수밖에 없었다. 착찹한 심정에 하늘이 노랬지만 별다른 수가 나지 않았다. 아니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학원 강사 1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전부터 돌아올 생각에 틈나는 대로 고향에 들러 농사일을 배웠던 터라 농사가 그리 두렵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막상 고향에 돌아와서는 한동안 마을 분들과 어울릴 수가 없었다. 특히 마을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마을모임에 참석하는 것이 여간 어색한 게 아니었다. 3대가 한 자리에 앉아 마을 회의에 참석한다는 것이 왠지 익숙하지 않았다. 게다가 대부분 농촌의 현실이 그러하겠지만 같은 또래의 젊은 사람이 없었다. 보통 열 살 위이거나 그 이상의 아저씨뻘 되는 분들이 수두룩했다. 마을에 다시 들어온 젊은이가 설 자리는 없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젊은 사람이 마을 일에 앞장서서 참여해야 한다”는 이장님과 마을 임원들의 권유로 마을회 총무 일을 맡아 볼 기회가 생겼다. 극구 사양했지만 ‘마을을 위해서’라는데 버틸 재간이 없었다. 반 강제적으로 마을회 총무일과 청년회 총무일을 떠맡게 된 것이 2003년이다. 마을에 봉사하고 어깨 너머로 농사도 배운다는 심정으로 열심히 선배들을 따라 다녔다.
농사는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익혀두었던 밤나무 접목 기술을 되살려 밤 재배부터 시작했다. 공주 밤은 명성이 자자해서 처음 농사치고는 결실이 제법 짭짤했다. 밤 재배로 벌어들인 돈은 다시 소를 길렀다. 그리고 지금은 만여 평의 밤나무재배와 한우 40마리를 키우고 있다.
고향에 돌아와 마을 일을 하면서 느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농촌에 제대로 일 할 수 있는 젊은 사람들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경제적인 이유에서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고들 말하지만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면서 새로운 정보를 찾는 등 조금만 부지런하면 시골생활도 그리 어렵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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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언평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