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C0201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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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죽산면 홍산리 내촌마을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이선희 |
[소설 『아리랑』에 나오는 하시모토]
하시모토는 일러전쟁 당시 통역관이었다. 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20대의 젊은 하시모토는 조선 땅에 남아 대농장주를 꿈꾸면서 마구잡이로 토지를 사들였다. 그리하여 그는 죽산면에 있는 토지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기에 이른다. 이후 그는 농장과 소작인들을 군대식으로 조직하며 소작쟁의를 막는 등 철저하고 치밀하게 농장을 운영한다. 간교하게 농민들을 착취했던 하시모토는 너른 황금빛 들녘을 보면서 황금을 떠올리곤 했다.
여기까지는 소설 『아리랑』에 나오는 하시모토에 대한 이야기다. 실제 하시모토는 1906년 군산을 통해 들어와 동진강 일대를 개간하고, 서포리 개간지를 중심으로 농장을 경영했다. 그가 죽산에 들어온 것은 1916년경이라고 한다. 그 증거는 1926년에 건립된 죽산면 죽산리의 하시모토 농장사무실에서 찾을 수 있다.
이후 하시모토는 1931년 자본금 50만 원의 법인주식회사 하시모토농장을 설립한다. 사장에 취임한 그의 재산은 개간지 120정보를 포함해 소유지답 350정보, 시유지전 90정보였고, 소작인도 55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농장을 경영했던 진짜 일본인 지주]
『아리랑』과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농장 사무실 때문일까?
내촌 일대의 주인도 하시모토였다고 알려져 있다. 사실, 주민들은 일본인들을 자주 보지 못했고, 더더욱 누가 지주인지는 알지 못했다. 일본인 지주를 대신해 관리하는 사람들만 목격했을 뿐이다. 결국 소설 『아리랑』과 농장 사무실과 같은 물증을 통해 으레 하시모토가 지주였을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그런데 2009년 5월, 내촌에 건립 중인 ‘아리랑 문학마을’ 조성 예정지에서 또 한 명의 일본인 지주가 흔적을 드러냈다.
가로 32㎝, 세로 94㎝, 폭 13㎝의 비석이 그것이었다! ‘웅본리평공적선불망비(熊本利平公積善不忘碑)’라고 새겨 있는 비석 뒤편에는 대정(大正) 14년[1925년] 5월이라고 쓰여 있었다.
이두영[1931년생] 할아버지는 “소작인들이 흉년이 들어 하늘만 쳐다보고 있으니까 웅본(熊本)이란 사람이 소작인을 위해 수만금을 시사해 그 공을 기린다는 내용인데, 웅본(熊本)은 하시모토가 아니고 구마모토라는 거지. 결국, 이 일대가 하시모토 땅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구마모토란 사람 것이었다는 얘기야.”라고 내용을 설명해 주었다.
[구마모토 공덕비에 쓰인 내용은 사실일까?]
일제강점기 당시 전라북도 내 일본인 대농장은 익산 춘포, 김제 죽산, 군산 대야에 있었는데, 이들은 동양척식주식회사, 교본[하시모토]농장, 웅본[구마모토]농장, 아부농장, 다목농장, 우근농장, 석천농장, 승부농장, 정목농장 등이었다. 그 중 교본[하시모토]농장은 김제 죽산면에 있는 서포리의 개간지가 중심이었다. 웅본[구마모토]농장은 김제 죽산면 연포리와 부량면 옥정리, 정읍 신태인 화호리 등지가 중심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비석의 주인공인 구마모토는 실질적으로 전라북도 지역에서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제하고 가장 많은 땅을 가지고 있었던 대지주였다. 1903년, 전라북도에 최초로 진출한 일본인 지주인 구마모토는 김제 일대에도 땅을 소유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하시모토와 관련한 기록이 많아서인지 김제 지역에서는 그다지 알려진 이름은 아니었던 것 같다.
구마모토에 관한 서적을 보면, 그는 능력 위주로 직원을 채용하고, 농업 개선 등으로 조선인들에게도 합리적인 경영을 했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조선인들의 순수한 마음을 이용해 고액의 소작료를 뜯어내는 등 교묘하게 수탈을 행했던 일본인 대지주였을 뿐이다.
구마모토 공덕비에 쓰인 내용이 사실이라면, 일대의 땅을 놓고 하시모토와 구마모토가 농지 확장을 위한 경쟁을 벌였을 것이라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아마도 하시모토가 승리를 거두면서 구마모토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지도 모른다.
내촌에서 구마모토에 대한 새로운 사실이 발견됐지만, 이를 증명하는 비석은 마을 한 구석에 애물단지처럼 놓여 있었다.
하시모토뿐 아니라 또 다른 일본인 대지주에 의해 고통 받으며 살아야 했던 당시 조상들의 뼈아픈 역사가 드리워졌기 때문일까?
1990년 『한국일보』를 통해 처음 소개되어 이제는 국민소설이 된 대하소설 『아리랑』은 뼈아픈 역사를 잊지 말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내촌마을 인근에 건설 중인 문학마을 건립 과정에서 하시모토 외에 또 다른 대지주 구마모토를 드러내면서 여전히 역사 속 우리 민중의 뼈아픈 현실에 대한 고발을 이어가고 있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