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B0101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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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동곡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진 희 |
『프랑스의 향수보다 마음의 향기가 오래 간다』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남아 있는 기억의 흔적들은 공간이나 시간과 연결되면서 만들어지는데, 동곡마을에서 만난 사람들은 1961년의 금평저수지 축조라는 사건을 둘러싸고 경험했던 기억들을 애써 외면하는 듯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처음에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가, 누군가 얼핏 당시와 연관된 어떤 이야기를 꺼내면 그제야 하나둘 기억이 난다는 듯 태연스레 이야기를 쏟아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을 사람들은 왜 당시의 일을 집단적으로 거부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저수지 축조로 인해 집터가 옮겨지고, 그 과정에서 의도하지 않게 경험해야 했던 갈등들이 몇 십 년이 흐른 뒤에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기 때문인 듯했다. 그렇지만 그 이면에 내재되어 있는 진한 감정은 다름 아닌 진한 향수(鄕愁)가 아닐까 싶었다.
[추억이 살아 있는 금평저수지 일대]
마을 어귀에 자리 잡은 금평저수지는 모악산에서 내려오는 수량으로 인해 마르지 않는 저수지라 불리고 있는데, 이 주변에는 마을 사람들이 ‘오리알터’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
오리알터라는 이름은 신라 말엽 풍수지리에 밝았던 도선과 개항기 증산교를 창시했던 강증산[본명 강일순]이 “장차 오리가 알을 낳을 곳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1961년도 이전만 해도 금평저수지 자리는 마을 주민 대부분의 집이 자리하고 있었다. 또한 마을 사람들 소유의 논들과 원불교 사찰, 한때 강증산이 기거했다는 김사유의 물방앗집[수침막]이 자리했고, 차가 잘 다니지 않을 당시에는 저수지 안쪽을 걸어서 소풍을 가거나 장터를 가기 위해 가로질러야 했던 추억과 애환이 깃든 공간이었다.
예전에는 가뭄이 들면 동곡마을을 비롯한 근동의 수십 동네 주민이 모여 기우제를 지냈으나, 저수지 축조 이후 금산면과 봉남면, 금구면 등 100여 마을 정도가 농업용수로 사용해도 물 걱정은 하지 않을 만큼 금평저수지는 다목적댐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강증산의 예지력이 빛나다]
금평저수지에는 강증산과 관련하여 또 다른 일화도 전하고 있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확인되지 않으나, 용암리에서 동곡마을로 가던 도중 강증산이 옆에 있던 제자에게 “여기를 수리재라 하라.”고 했다. 제자가 수리재가 무엇이냐고 물어 보니 강증산이 “물 넘어가는 고개도 모르냐? 이리로 물이 넘어가니 수리재라 불러라.”라고 대답했다. 스승의 말을 들은 제자는 냇물이 잘 흐르고 있는데 고개가 어디에 생겨서 물이 넘어오는 수리재라고 할까 당혹스러워 했지만, 강증산은 그렇게만 알고 있으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금평저수지가 축조된 현대에 이르러 강증산의 예지력을 설명하는 일화로 소개되고 있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