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A0204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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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광활면 옥포리 화양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한천수 |
화양마을이 자리한 광활면의 하우스 감자 농사는 11월 중후반에 시작해서 이듬해 4월 중순부터 5월 중순까지 계속된다. 하우스 감자의 성공으로 8월 15일에 있던 ‘광활면민의 날’ 행사가 감자 수확기인 4월 10일로 옮겼고, 명칭도 ‘광활햇감자축제’로 바뀌었다.
[감자 농사를 시작하다]
“맨 처음 [하우스 감자를] 광활서 시작한 것은 임인식이여.
그 사람이 맨 처음에 시작혔어. 그 전에는 딸기[를 했고], 딸기가 그때는 수입이 맞았었지. [하지만] 인건비가 많이 들은게 [지금은] 안 혀. 우리도 딸기 했어. 김제원예조합에다 내고, 즈그가 와서 가져가고. [딸기는] 저녁 때 따, [그리고] 밤샘 선별 작업을 혀. [그러면] 아침이면 와서 실어가.”[이순구, 1931년생]
하우스 감자를 누가 시작했는지에 대해서는 주민들 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광활농협 조합장을 지냈던 고 안갑순[1935생] 씨가 시작했다는 사람도 있고, 화양1구 주민인 임인식 씨가 시작했다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하우스 감자 농사 시작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안갑순 씨는 농협을 통해 광활면 전체 하우스 감자농사에 영향을 주었으며, 임인식 씨는 타지에서 하우스 감자 농사를 배워 광활면에서 재배하기 시작하였다.
“[벼농사 이외의] 다른 작물로 딸기, 감자 많이 했죠. 1970년 중반부터 하기 시작했어요. 그 전에 하우스 딸기를 하는데, 식구대로 하니까 많이는 못 허고 [비닐하우스] 한 동씩 [했어요]. 감자도 1970년 중반에 시작해 가지고 한두 동씩 하다가 차츰 늘어났지. 그때는 지금처럼 철제 파이프가 아니고 대나무로 했어요. 그 전에는 대막가지를 손으로 묶어 가지고 하우스를 했어요. 그때 조합장 안갑순 씨라고, 그 양반이 여기 조합장할 때 많이 노력을 했지.
[하우스 감자는] 12월 초에 심어서 12월 말, 늦게 심는 사람은 1월 초에도 심는데, 대개 12월에 심어요. 4월 10일경부터 5월 10일까지 한 달 꼬박 작업을 해요.
[면민의 날은] 4월 10일. 행사도 감자 캐기에 맞춰서 해야 하는데 날짜를 일찍 잡았어요. [원래] 면민의 날은 광활초등학교 동문회에서 시작된 거에요.
여기서 임원들이 구성되어 가지고 면민의 날을 정했는데, 원래 면민의 날이 8월 15일 [광활]초등학교에서 행사도 하고 그랬는데, [지금은] 4월 10일 ‘감자축제’ 명칭을 붙여 가지고 면민의 날을 하는 거지.”[박기영, 1948년생]
[임인식 씨의 감자 농사 이야기]
임인식 씨를 직접 만나 광활에서 누가 하우스 감자 농사를 어떻게 시작하였는지에 대해 물었다.
“처음에는 딸기를 나하고 [주민] 여섯 명이 논산서 가져다 [광활면에서] 최초로 시작했어요. 그때는 내가 [비닐하우스 없이] 노지(露地)[평지]를 했어요. 초창기 그때만 해도 농촌서는 큰돈이었네요. 손에다 [딸기를] 조금만 들고 가도 쌀이 몇 짝여. 그렇게 수확이 좋았고, 딸기 금이 좋았어요. 이렇게 몇 년 하다 딸기로 하우스 하게 됐어요. 그때가 서른다섯, 서른여섯 살[1978~1979년] 됐었을 거요.
딸기 허다 보니까 잠은 많이 자야 3시간뿐이 못 자는 거요. 왜냐면 새벽 3시부터 나가면 이집 저집 [딸기] 걷어 가지고 전주 가면 6시나 되거든요. 딸기 팔고 와서는 정신없이 딸기를 또 따야 혀, 매일 매일 따야니까. 딸기 따고는 밤 12시까지 그놈을 다 선별 작업을 해요. 그러다 그거 팔고 오면 저녁에 계산을 해얄 거 아뇨. 계산에 맞춰서 아침에 갖다 주고 딸기 싣고 또 가야니까. 이렇게 되니 [일이 힘들어서] 저녁에 잠자려고 하니까 무릎이 쑤석쑤석해서 잠 잘 수가 있어야지.
그리고 그때 [하우스 때문에] 비닐 회사 댕기면서 보니까 [누가 비닐을] 차떼기로 가져가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사장한테 물어 봤어, “뭣 허는 사람인디 비니루를 이렇게 많이 가져가냐”고. 그랬더니 감자를 한다고 그래요. 나도 한 번 구경 가 봐야겠다 허고 따라가 봤어요. 그 사람은 하우스 감자를 하는 거에요. 금구[면에 사는] 최경식 씨라고 지금 한 팔십객 되었을 거요. 그분한테 내가 3년을 쫓아 댕기면서 감자하는 것을 배웠어요.
[딸기 농사로] 무릎이 아프니까, 잠도 못 자고. [그래서] 내가 하우스 감자를 [광활면에서] 최초로 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지금 [하우스 감자] 안 헌 지가 6년짼가 되어요. [하우스 감자는] 내가 최초로 허기는 혔어.
[씨감자를] 최초는, 내가 제주도에서 갖고 왔어요. 안갑순 씨가 [농협]조합장 할 때 씨감자를 가지러 간 것은 강원도고. 내가 하면서부터 감자가 퍼져 가지고 조합에서 관여를 한 것이지. 그래 갖고 나중에 조합에서 관여허면서부터 내가 조합에 가서, 제주도 가서 감자 수매도 직접 허고 그랬어요.
[감자 농사 배우러] 외지에서 봉고차로도 오고, 주위에서도 오고, 내가 다 갈쳤어. 차츰 차츰 벌린 것이 광활면에 싹 퍼졌지. [인근] 동진면에 가서 감자 교육도 하고 그랬어요.
나는 지금 젊다 허면 이제 감자는 안 해요, 허면 딸기를 허지. 딸기가 훨씬 돈이 되고, [재배] 기술도 있고. [우리 집은] 딸기 허고 감자혀서 심[살림살이가] 폈죠, [논]농사만 지어가지고는 어림도 없어요.”[임인식, 1944년생]
“안갑순 조합장이 감자 끄져다 논 거여. 딸기도 그 사람이 끄져다 놓고. 여기 딸기도 한참 잘되었었어.
감자를 심기 시작한 지가 한 30년 정도 돼야. 그 사람이 일본 가서 교육받고 와 가지고 [광활면에] 이앙기 가져오고, 저기 강원도 가서 감자 농사짓는 교육을 습득 해 갖고 와 갖고, 광활로 가져와서 퍼친 거여. 안갑순 출생지가 김제 백산 사람이여.”[조용환, 1935년생]
1970년대 후반 광활의 농가에서는 논농사만으로 도시만큼의 소득을 올릴 수 없게 되자, 상품 작물을 재배하기 시작했다. 도시 생활을 하다가 귀농한 임인식 씨의 경우 처음에는 딸기재배를 하였으나 일이 힘들고 고되어 감자로 재배 품목을 바꾸었다.
광활농업협동조합 조합장을 역임한 안갑순 씨는 선진 농촌을 건설하고자 광활면에 최초로 이앙기를 가져왔고, 상품 작물의 생산과 교육은 물론 농산물 판매에도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한다. 화양마을이 자리한 광활에서는 상품 작물인 딸기와 감자 농사가 성공하면서 주민들의 소득도 높아졌고, 살림살이도 많이 좋아졌다고 한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