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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6A010101
한자 日帝米穀 收奪의 現場
지역 전라북도 김제시 광활면 옥포리 화양마을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문예은

[벼농사 중심지에서 일본 사람들의 식량 창고로 변하다]

일제강점기 김제 지역이 전라도 평야 지대에서 생산되는 쌀을 모아 호남선을 통해 군산으로 보내는 배후지의 역할을 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왜 김제는 그런 역할을 떠맡아야 했을까?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자본의 급속한 축적으로 농민의 대량 이동과 도시 노동자의 급증이란 사회 현상이 나타났다. 그 결과 일시적으로 식량 수급(需給)[수요와 공급을 아울러 이름]을 악화시켜 1918년에는 쌀 소동이 일어날 만큼 식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 처했다. 이에 일본은 자국과 가까운 조선에서 식량 증산을 강행하여 식량을 안정적으로 확보하여 공급함으로써 식량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김제는 지리적으로 만경강, 동진강, 원평천 유역의 충적지에 속하여 호남평야를 이루는 전국 최대의 곡창 지대이자 전형적인 논농사 지역이었다. 또한 삼국시대에 벽골제를 축조할 정도로 벼농사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결국 비옥한 토양과 수질로 농경의 조건이 좋은 김제 지역은 일본 사람들의 표적이 되었다. 일본 사람들은 인근에 군산항을 건설하고, 김제평야를 가로지르는 호남선 철도도 건설하였다.

이로 인해 곡창 지대로 잘 알려진 김제로 일본인 지주와 소농들이 대거 진출하기 시작했다. 김제는 이 같은 시대의 흐름 속에서 ‘식민지형 소도시’로 성장하게 되었다.

[식민지형 소도시가 되다]

일제강점기를 기점으로 해서 김제 지역에는 크게 두 가지 변화가 나타났다. 먼저, 철도역이 생기면서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미곡의 집산지로서 교통이 편리해지자 많은 일본 사람들이 들어와 정착하였다. 철도가 개통된 1914년을 기점으로 점차 인구가 증가하기 시작했고, 일본인 주거지를 중심으로 발전이 이루어졌다.

일본 사람들이 역전을 중심으로 도로망을 체계적으로 건설하면서, 한일합방 이후까지 김제 지역은 식민지형 근대 시가지가 신설되었다. 각종 관공서 및 단체, 여러 회사와 상점도 들어서게 되는 등 근대 도시로의 성장이 이루어졌다.

다음으로, 해안과 하천 연안 지대에 개간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해안가 갯벌 지대와 강 하구의 황무지를 개간하기 위한 농지 확장 사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일본 정부는 1920년부터 산미증산계획이란 이름을 걸고 수리 시설과 토질을 체계적으로 조사하여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농지의 개간에 초점을 두었다.

이러한 계획 아래 대규모 간척 사업이 이루어져서, 2009년을 기준으로 김제시 총 면적의 5.9%를 차지하는 농지가 조성되었다.

이 새로운 땅은 동진농장주식회사가 관활하던 일대였기에 동진농장, 혹은 당시 간척 사업을 맡았던 아베 후사지로[阿部房次郎]의 이름을 본 따 아베농장으로 불렸다.

당시 이 지역은 행정구역상 김제군 진봉면에 속했으나, 해방 이후인 1949년 진봉면에서 분할되어 현재의 광활면에 속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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