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009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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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周昇 |
영어음역 | Jo Juseung |
이칭/별칭 | 장일(章日),벽하(碧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요촌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
집필자 | 채수환 |
성격 | 서예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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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전라북도 김제시 요촌동 |
성별 | 남 |
생년 | 1854년 |
몰년 | 1903년 |
본관 | 김제 |
[정의]
개항기 전라북도 김제 출신의 서예가.
[개설]
조주승(趙周昇)의 본관은 김제(金堤), 자는 장일(章日), 호는 벽하(碧下)이다. 1854년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시 요촌동에서 태어났다. 아들은 한학자이자 서예가로 이름난 조기석(趙沂錫)이다.
[활동사항]
조주승은 어려서부터 예능에 대한 재주가 출중하였으며, 해서(楷書)와 사군자가 뛰어났다. 진(秦)·당(唐)·송(宋) 등 여러 나라 대가들의 글씨를 보고 수년 동안 정진한 끝에 왕대령(王大令)의 낙신부(洛神賦)와 안로(顔魯)의 가묘비(家廟碑)의 진수를 체득하였다고 전한다. 석정(石亭) 이정직(李定稷)의 문하에 들어가 10여 년 동안 문시서난죽(文詩書蘭竹)의 그림 그리는 법과 시조, 거문고 등 일곱 가지 예능을 연마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또한 시창(詩唱)과 탄금(彈琴)에서도 악공이 따를 수 없는 놀라운 경지에 들어섰다. 흥선대원군이 조주승의 글씨와 난을 보고 ‘창난벽죽(倉蘭碧竹)’이라 칭송하였다는 일화도 전한다.
일찍이 중국의 북경과 남경에서 3년여를 유람하는 동안 이름난 학자들과 어울리고 글씨와 그림의 대가들과 교유하여 견문을 넓혔다. 이윽고 귀중한 서화를 수집하여 돌아와서는 감상하는 일로 마음을 달래었는데, 동학혁명 때 집과 함께 소실되었다. 몽인(夢人) 정학교(丁學敎)는 조주승의 글씨를 구양순에 비겼고, 매천(梅泉) 황현(黃玹)은 송일중(宋日中)·이삼만·조주승을 손꼽아 정족(鼎足)이라 칭송하였다고 전한다.
[저술 및 작품]
충청북도 보은군에 있는 법주사(法住寺) 일주문 현액과 전라북도 전주시에 있는 남고산성(南固山城) 관성묘(關聖廟)의 현액을 썼다. 서울대학교에 「묵죽도」가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