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008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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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廷榮 |
영어음역 | Bak Jeongyeo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흥사동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채수환 |
[정의]
조선 전기 김제 출신의 의병.
[가계]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효화(孝華), 호는 신촌(薪村). 고려 말의 유신(儒臣) 정재(鄭齋) 박의중(朴宜中)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참봉을 지낸 박이(朴頤)이다.
[활동사항]
박정영(朴廷榮)[1559~1592]은 지금의 김제시 흥사동 제내마을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재종숙인 굴지당(屈指堂) 박석정(朴石精)에게 글을 배워 11살 때 『주역(周易)』을 알고 경전(經傳)과 술수(術數)에 밝았다. 그뿐만 아니라 효성 또한 지극하여 내간상(內艱喪)에 1년간, 외간상(外艱喪)에 3년간 무덤 곁에 움막을 짓고 살며 지극한 정성으로 섬겼다.
34세인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박석정, 김제군수 정담(鄭湛) 등과 뜻을 모아 격문을 띄워 의병을 모집하여 웅치전투에 참가하였다. 웅치전투에 출발하기 전 아들 박간(朴侃)에게 유서를 남겼는데, 이미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기로 작정하였던 것이다. 웅치전투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장렬히 순절하였다.
[저술 및 작품]
유서(遺書), 맹약문(盟約文), 격문(檄文), 가서(家書) 등이 수록된 『신촌유고(薪村遺稿)』가 있다.
[상훈과 추모]
선조는 박정영에게 신촌이라는 호를 내리고, 예관(禮官)을 보내어 박정영의 선산인 두악산(斗岳山) 서쪽 기슭에다 그 넋을 불러 장사 지내는 한편, “아아 슬프다. 지난 일이니 후회한들 무엇 하리, 외로운 혼만이 산에 남아 후인들을 경계하도다. 산골짜기 물소리만 저승과 이승을 어지러이 맴돈다. 늠름한 기상이 크게 뛰어나니 명문의 집안에 은혜가 길이 빛나리”라는 제문을 지어 위로하였다. 승정원좌승지겸경연참찬(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에 추증하였으며, 김제시 백산면 석교리 청곡사(靑谷祠)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