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007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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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平九 |
영어음역 | Jeong Pyeonggu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제월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창섭 |
성격 | 발명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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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전라북도 김제시 제월동 |
성별 | 남 |
생년 | 1566년 |
몰년 | 1624년 |
본관 | 동래 |
[정의]
조선 전기 전라북도 김제 출신의 비거 발명가, 무신.
[개설]
정평구(鄭平九)는 전라북도 김제 출신으로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였다. 청년이 되어 문과에 응시했으나 낙방하여 다시 무과에 응시하였고, 이후 무관 말단직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전라우수사로 부임해온 당시의 명장 이억기(李億祺)가 정평구의 사람됨을 알아보고 중용함으로써 비로소 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정평구와 비거(飛車)에 관한 상세한 기록은 없으나 최남선은 정평구를 한국을 빛낸 100인의 위인으로 선정하기도 하였다.
비거는 중국의 기록 가운데 진나라의 장화(張華)가 쓴 『박물지(博物志)』에도 나오며, 북송의 시인 소식(蘇軾)의 「금산묘고대시(金山妙高臺詩)」에도 나오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이미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를 이용하여 정평구가 응용 개발한 것으로 보인다.
[활동사항]
정평구는 이억기에 의해 진주 병영 별군관으로 발령받아 근무하게 되었으며, 임진왜란 당시에는 김시민의 휘하에서 화약을 다루는 임무를 맡았다. 이때 일본의 신식무기인 조총 앞에 조선의 창과 화살은 매우 무력했고, 이에 정평구가 오늘날의 비행기 같은 비거를 만들게 되었다.
비거를 발명하여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진주 싸움에서 외부와 연락할 때 사용하게 하였다. 또한 비거를 이용하여 영남의 외로운 성에 갇혀 있던 성주를 30리 밖으로 탈출하게 했다고도 전한다. 기록에 의하면 비거는 무려 30~50리를 날았으며, 이를 이용해 정평구는 진주성으로 식량을 나르고 종이폭탄도 발명하여 전투에 사용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