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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600637
한자 金堤傳敎碑
영어음역 Gimje Jeongyobi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전라북도 김제시 오정동 259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나종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1974년 9월 27일연표보기 - 김제전교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65호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김제전교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재지정
성격 비석|전교비
양식 4면 화강암비
건립시기/일시 1680년연표보기
관련인물 이순익
재질 화강암
높이 212㎝
너비 60㎝
소재지 주소 전라북도 김제시 오정동 259 지도보기
소유자 김제시
문화재 지정번호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정의]

전라북도 김제시 오정동에 있는 조선 후기 전교비(傳敎碑).

[건립경위]

전라도 금구현의 일북면·하서면·초처면은 모두 벽골제의 물이 흐르는 곳에 인접해 있어서 비가 조금만 와도 다리가 떠내려가 도랑을 건너려면 물이 빠지기를 기다려야 했다. 그런데 관가에서 파견된 사감(司監)들이 홍수에 대비하여 도랑을 깊이 파고 다리를 가설한다는 명목으로 백성들로부터 각종 세금을 징수하여 많은 폐단을 야기하였다.

이에 1680년(숙종 6) 당시 금구현령이었던 이순익(李純翼)이 보(洑)와 제언(堤堰)으로부터 세를 거두어들이던 폐단을 혁파하라는 전교를 받았다. 이에 이순익은 자기 고을의 사감을 물러나게 하는 행정 처분을 내렸으며, 그와 같은 조처에 대해 명확히 하고 왕이 교지를 내려 이곳 주민의 조세를 면제해 준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김제전교비를 건립하였다.

[위치]

봉황동사무소에서 봉황농공단지 쪽으로 1㎞쯤 가다가 왼쪽으로 200m쯤 되는 지점에 있다.

[형태]

비문은 4면의 화강암비로, 전교(傳敎)와 현감의 발문(跋文) 그리고 유사(有司)와 감관(監官)의 성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금석문]

전면에는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傳曰近聞各邑惑有收稅及洑偃等處大爲生民切骨之□而自稱官差司監者推提平民恣行虐貧是可曰國有法綱乎庚戌以後所收稅所築堰處自巡營一一査問民願所同然處外修報籌司一倂革罷後亦以此意曉諭坊曲□斷橫濫害民之弊盖洑堰之收稅先占形便允從庶願惟利所在民歸之猶水就下其害不祛衆□之成城彌堅國典之所係輿情之莫□顧何如哉本邑三面處於碧堤□流之所一坪延□三邑交錯地勢旣窪汚浦橋且橫距每値渠漲之節未免沈□之患苟能深濬斯浦永□斯橋則似惑爲一勺之洩而不過是尺寸之利遽自年來稱以司監不遵面里之議爲充溪壑之欲浦雖略穿橋則依舊匪今斯今之水害自在從某至某之地稅勒執於是焉怨聲狼藉弊源鱗生□在字牧之任未可以越視故所謂司監之類申令而齋退矣何幸庚申九月初三日洪惟我聖上階前萬里之明見天日至照於覆盆除下十行之渙音時雨大行於遐□凡厥□高□厚者□不蹈舞於照濡之中也玆拏奉聖旨率□衆感面而布諭手成節目勒之白石堅之碧野圖所以歷千紀不泯之計而若有日後

측면에는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之更犯寔是化外之難悛然則民告于官官報營自營而轉徹籌司以法從事繩愆糾謬豈非對揚我聖上軫恤盛德之萬一也哉崇禎紀元後庚申十月初一日知縣臣李純翼奉敎謹跋都有司臣崔祥萬一北有司臣崔昌鶴下西有司崔衡俊草處有司臣金敬義

후면에는 ‘감관신장기찬(監官臣張基讚)’이라고 새겨져 있다.

[현황]

김제전교비 옆에는 또 하나의 비가 있는데, 현령 이순익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백성들이 김제전교비 옆에 세운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이다. 이순익의 공으로 교지가 내려 면세된 것을 감사하는 뜻으로 백성들이 비를 세웠다고 한다. 이 비들은 뒤에 방치하여 파손된 것을 1971년 지역 촌로들이 찾아내어 보존했으며, 1973년에 원형대로 복원하였다. 김제전교비는 1974년 9월 27일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65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전라북도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현재 김제시에서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김제전교비를 통해 당시 제방을 둘러싼 폐해와 그것으로부터 백성들을 보호하려는 정부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문서비는 많지 않기 때문에 사료로서 가치가 있고 당시의 사회상을 알 수 있는 연구 자료가 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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