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002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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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蒼堤里 |
영어음역 | Changje-ri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광활면 창제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최진성 |
[정의]
전라북도 김제시 광활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유래]
정확한 지명 유래는 알 수 없지만 ‘푸른 바다를 막은 제방 덕택에 만들어진 간척지’라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창제리(蒼堤里)라고 이름 지은 것으로 여겨진다.
[형성 및 변천]
조선 말기 만경군 하일도면에 속했던 지역이다. 바닷물이 드나들던 간석지였다가 일제강점기에 간척하여 진봉면 심포리에 편입하였다. 1949년 용평·신광·금복 등 3개 마을을 병합하여 창제리라 하고 진봉면에서 분할된 김제군 광활면에 편입하였다. 1981년 행정구역을 조정하면서 용신·용평·신광·신흥·신구·구복 등 6개 마을로 개편하였다. 1995년 1월 1일 김제시와 김제군이 통폐합됨에 따라 김제시 광활면 창제리가 되었다.
[자연환경]
광활면의 모든 지역이 그렇듯이 바다를 메워 만든 간척지이다. 농업용수는 신평천(新坪川)에서 유입되는 관개 수로에 의존하고 있다.
[현황]
2009년 12월 31일 현재 총 208가구에 441명[남자 222명, 여자 219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자연마을로 용평(勇坪)·용신(勇新)·신광(新光)·신흥·구복(九福)·신구(新龜) 등이 있다. 용평은 일제강점기에 칠답구(七畓區) 지역으로, 1931년 57가구가 이주해 오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마을에 이봉춘이라는 장사(壯士)가 살았으므로 힘이 세고 용맹한 마을이라는 뜻에서 용평이라 하였다.
용신은 1981년 행정구역을 조정하면서 용평에서 분리되어 새로 생긴 마을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신광은 일제강점기에 팔답구(八畓區) 지역으로, 1932년 70가구가 이주해 오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마을에 청년들이 많아 씨름대회가 열리면 항상 우승을 차지하니 더욱 새롭고 빛나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신광이라 하였다.
구복은 일제강점기에 구답구(九畓區) 지역으로, 땅이 기름져 광활면의 모든 복이 이곳에 모여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신구는 구복의 인구가 증가하자 1981년 행정구역을 조정하면서 구복에서 나누어져 새로 생긴 마을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광활면의 지형이 거북과 같고, 신구가 거북의 머리에 해당하므로 거북 ‘구(龜)’자를 썼다.
창제리는 일제강점기에 광활면을 포함한 김제평야의 쌀을 수탈하기 위해 진봉반도를 간척하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일제는 노동력을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 바둑판식으로 정리된 농경지에 다섯 내지 여섯 가구를 한 단위로 가옥들을 일렬로 배치하였는데, 지금도 구복마을에 이 같은 일자형으로 배치된 가옥이 남아 있다.
창제리는 광활면에서도 바닷바람이 가장 강한 곳으로, 일제강점기에는 겨울철에 불어오는 북서풍에 대비한 바람막이 시설이 마치 울릉도의 우데기처럼 처마 밑에 둘러쳐져 있었다. 여가를 즐기기 위한 서비스 시설들은 중심지인 광활면 소재지에 집중 배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