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C0301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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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죽산면 홍산리 내촌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선희 |
[내촌마을에 유일한 과수원]
논농사가 일반적인 내촌에 유일하게 있는 과수원!
1967년, 우연히 심었던 몇 그루의 배나무가 시작이었다.
2003년경 정부로부터 친환경 저농약 농장으로 인증을 받은 이 과수원은 마을 토박이 박성균 할아버지의 젊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곳이기도 하다.
박성균 할아버지는 젊었을 때부터 과수원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전북대학교 농과대학을 졸업한 재원으로 수년간 공직에서 활동했었다. 과수업을 하기 전엔 김제시 농촌지도소에 근무했는데, 농촌지도소가 내촌지도소가 아니냐는 말을 들을 만큼 마을과 관련한 사업들을 많이 추진했다.
박성균 할아버지가 과수원을 하게 된 것은 배나무 근처에 심어 있던 탱자 울타리 때문이었다. 논 근처 평야 지대에 배나무 몇 그루를 심었는데, 인근에 배나무가 없어 혹여 누가 해코지를 할까 싶어 탱자나무로 울타리를 만들었다. 그런데 배나무와 울타리를 볼 때마다 마음도 편해지는 것이 왠지 모를 끌림이 있었다. 과수원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배나무로 가득 찬 넓은 땅을 상상하니 너무 좋아 배나무를 심기로 결심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농촌지도소에 과감히 사표를 던지고 약 3천 평[9,917.36㎡] 남짓한 면적에 배나무를 심었다.
[과수원 하면서 별별 일 다 겪었어]
사실 과수원을 하기까지 고민도 많았다. 특히 대학교를 졸업한 아들이 과수원을 한다고 했을 때 집안 분위기는 말이 아니었다.
부친의 실망도 실망이었지만 안정적인 직업을 등지고 고생스러운 농사일을 하겠다는 남편을 보며 아내도 속상해했다. 아버지와 의절까지 할 상황에 몰렸지만 박성균 할아버지는 뜻을 꺾지 않았다. 과감한 결정이라 말은 못했지만 속상한 일도 많았다.
“인근에 과수원이 없다 보니까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호기심으로 심어 놓은 묘목을 마구 뽑아 가더라고. 그때는 지금처럼 튼튼한 울타리도 없었으니, 그렇다고 지키고 서 있을 수도 없고, 막을 길이 있나.”
300주의 배나무가 어느 날 보니 40주나 없어졌다. 한 번은 없어진 배나무가 윗동네에 심어 있어져 있는 것을 보고 부아가 치밀어 다시 뽑아다가 심기도 했다. 인근에 과수원이 없다 보니 심지어는 부안에서까지 와서 뽑아 가기도 했다. 그때는 자가용이 없던 때라 뽑아 가지고 지게로 지어 옮길 수밖에 없었는데, 뽑아 가다 무거웠던지 지게까지 통째로 버린 것도 봐야 했다.
배가 열린 뒤에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서리도 참 많이 당했다. 아예 톱까지 가져와서 작정하고 따간 이들까지 있었다. 배고프다고 따가는 이들도 있었고, 애들은 마을에 생긴 과수원이 신기하고 서리하는 재미도 있어 따 가기도 했다. 혼을 내주겠다고 쫓아가 보면 이내 아니라고 발뺌하니 어찌할 수가 없었다. 마을 주민 모두 한 가족 같으니 집에 쫓아가서 뭐라고 할 수도 없고, 그저 속만 탈 뿐이었다.
한 번은 흑선병이 들어 통으로 배나무를 치워야 할 때가 있었다. 흑선병은 배나무 보호수로 만들어 놓은 향나무 울타리에서 발생한 것이었는데, 당시엔 원인도 모르고 배나무가 죽어 가는 것을 보며 박성균 할아버지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졌다고 한다. 그만큼 과수원은 박성균 할아버지의 애정이 담긴 곳이었다.
[아들이 대를 잇다]
박성균 할아버지의 청춘이 담긴 과수원은 이제 아들이 맡아 운영하고 있다. 박성균 할아버지가 운영할 때에는 배가 주력 과수였다. 복숭아도 심어 봤지만 수명이 15년밖에 안 되어서 후기작으로 사과를 심어 보기도 했었다. 하지만 일조량의 문제로 인해 사과가 실하지 못하자 사과나무를 뽑아내고 다시 배나무를 심었다.
현재 과수원에는 블루베리가 여러 그루 심어져 있다. 블루베리는 아들이 심은 것이다. 전주에 살고 있는 아들은 전주와 내촌을 오가며 과수원 일을 돌보았는데 요즘은 거의 내촌에서 살다시피 한다. 박성균 할아버지의 아들은 과수원에 바쳐진 아버지의 청춘에 자신의 청춘을 더하고 있는 것이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