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C0202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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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죽산면 홍산리 내촌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선희 |
[뜸마다 우물이 있었지]
마을이 워낙 크다 보니 내촌마을에는 고개고개 넘어 공동 우물이 여러 개 있었다. 우물은 각각 너머뜸, 재너머, 큰뜸, 웃몰[웃멀], 구석뜸에 있었는데, 유추해 보면 마을 주민들의 마을 내 구분은 우물을 중심으로 한 생활 밀집 단위를 기초한 것으로도 여겨진다.
공동 우물은 마을 아낙들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형편이 넉넉한 집에서야 집 안 마당에 우물을 만들었지만 그렇지 않은 집에서는 우물에서 물을 길러다가 집에 필요한 식수와 생활용수로 이용했다.
갓 시집왔던 김분순[1933년생] 할머니는 매일 같이 일어나자마자 공동 우물에서 물을 기르는 게 하루의 첫 일이었다고 한다. 물동이로 물을 기르다 돌부리에 넘어져 물을 쏟는 일도 다반사였다. 제주도에서 자주 보는 것같이 물동이를 등에 업어 보기도 하고 별의별 수를 다 써 봤으나, 결국 가로의 긴 막대기 양 끝에 물통을 단 물지게로 물을 길러다 사용했다.
우물에서 수차례 물을 지어 나르다 보면 온 몸에 힘이 쭉 빠졌다. 길러 온 물은 솥에 붓고 데워 가족들이 씻을 물을 덥히는데, 한겨울 어렵사리 길러다 데워 놓은 물을 어쩌다 일찍 일어난 시동생이 먼저 씻는답시고 다 써 버리면 말은 못하고 부아가 치밀기도 했다.
그럴 때는 밥상을 차리기에도 정신없었지만 물이 부족하면 시어머니 볼멘소리가 듣기 싫어 또다시 길러 나갔다. 도와주지 못하는 남편이 얄밉기도 했지만, 다들 그렇게 살 때라 그러려니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우물이 집 가까이 있으면 괜찮지만 고개 너머 있는 경우엔 아침마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
매일 같이 물 길러 다니는 게 힘들었기에 집집마다 여유가 생기면 집 마당에 우물을 파는 일이 늘어났다. 그리고 1970년대 마을에 전기가 공급되면서 공동 우물은 자취를 감추었다.
지하수가 일반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우물로 물을 뜨러 다니던 고충 때문에 여전히 아낙들에게는 물 한 방울이 귀했다.
지금은 마을 내 상수도 공사가 끝나 집집마다 수돗물이 공급되고 있지만 오랜 세월 몸에 베인 물 절약 사용은 여전하다.
김분순 할머니는 설거지를 할 때면 늘 물을 모아 놓고 사용한다. 또 비가 오는 날이면 처마 밑에 대야나 양동이를 가져다 놓는다. 빗물을 모아 집 뒤에 있는 비닐하우스 작물에 주기 위한 것인데, 수돗물보다야 빗물이 작물에 좋다는 생각에서이다.
[주민들이 공동으로 운영했던 새마을점포]
마을의 규모를 짐작해 볼 수 있는 것 중에는 마을에 한때 있었다던 3개의 슈퍼마켓이다.
마을 주민에게는 슈퍼마켓보다 점포가 더 친근한 표현일 것이다. 점포는 1960년대부터 있었다. 이북에서 내려와 잠시 거주했던 이들이 운영했던 생선 점포와 내촌 주민이 운영한 식료품 점포 2개가 있었다.
생선 점포는 오래되지 않아 자취를 감추었지만, 박영환[1934년생] 할아버지를 주축으로 부녀회가 주도해 운영했던 금고 형식의 새마을점포는 오랜 세월 지속되었다. 새마을점포의 운영 경비는 1년에 2가마니 정도 소요됐는데, 주민들이 모금으로 충당하였다. 따라서 점포를 운영하면서 나온 이익은 철저하게 나누어 주민들에게 지급됐다. 동네 자금으로 운영하기 때문에 이익이 발생하면 한 푼이라도 철저하게 따져서 마을 주민들에게 배당금 형식으로 나눠 주었던 것이다.
새마을점포에서는 주로 생필품을 판매했다. 생필품은 시장에서 직접 사다가 판매하기도 했고, 마을을 돌며 생필품을 파는 차량으로부터 구입하기도 했다. 새참거리로 막걸리도 판매했는데, 점포에서 술을 먹고 소소한 다툼이 자주 발생하면서 문을 닫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있었던 점포는 담뱃가게였다. 새마을점포가 없어지면서 한 할머니가 집에서 담배만 판매했는데 그조차도 할머니가 아파 병원에 계시는 바람에 문을 닫았다.
담배 가게의 흔적은 할머니 집 나무에 매달아 놓은 간판을 통해 여전히 남아 있다.
옛 노인회관 건물 벽에는 ‘두부 1모에 500원’이라는 가격이 새겨져 있다. 언제적 가격인지 정확하진 않지만 할머니들은 현재 시장에서 두부 1모를 1,000원에 구매한다고 하니 물가 차이도 엿보게 한다.
현재 내촌마을은 고령의 독거노인이 많이 있는 여느 농촌과 다르지 않다. 한때 120여 호에 이르는 큰 마을에 대한 추억은 주민들의 기억 속에 존재할 뿐이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