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C010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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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죽산면 홍산리 내촌마을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이선희 |
[지명으로만 남아 있는 방죽과 저수지]
내촌마을과 인접해 거의 한 마을이나 다름없는 외리에는 저수지가 있었다고 한다. 처음 마을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한 임씨 일가가 저수지를 쌓으면서 마을을 번성시켰다는 이야기기가 전한다.
외리도 그렇고 내촌도 그렇고 현재 마을의 어느 곳에서도 저수지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다만 ‘앞방죽’과 ‘뒷방죽’이란 지명과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는 옛 말을 통해 저수지가 있었음이 유추된다.
앞방죽, 뒷방죽이란 지명은 내촌마을 주민들이 사용하는 명칭이다. 내촌마을에도 크진 않지만 오래전에 방죽이 있었으나 논으로 개간되어 없어졌다고 한다.
내촌마을에서 나고 자란 정인곤[1932년생] 할아버지는 직접 방죽을 보지는 못했지만, 일제강점기 초 일본 사람들이 일대의 땅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동진수리조합이 방죽을 메워서 농지로 바꾼 것 같다고 추정했다.
정인곤 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방죽을 본 기억은 없지만 방죽이 있었던 자리를 아는 주민은 더러 있었다. 대다수 주민들은 유난히 발이 쭉쭉 빠져 제대로 걷지도 못했던 논을 기억하고 있었다.
강곡례[1930년생] 할머니는 당시를 회상하며 “논두렁 걸으면서 이렇게 좋은 세상을 못 보고 간 사람들은 얼마나 억울할까?”란 말을 주민들이 종종 나누었다고 전했다. 논으로 일하러 다니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런 말이 나왔을까 싶기도 했다.
[마을의 생명줄 방죽과 천]
지금처럼 수리 시설이 완비되지 못했던 시절에는 방죽이 생명줄과도 같았다. 농사지을 물이 없어 만들었던 방죽은 마을 사람들의 식수로도 이용되었다. 어떤 주민들은 아마도 내촌마을 일대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을 것이라고도 말한다. 땅이 질척한 것은 물론이고, 소금기도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내용은 추측일 뿐 사실을 확인할 길은 없다.
여하튼 방죽은 일제강점기에 사라졌고, 논으로 바뀐 방죽에 대한 소유권은 일본인 지주가 가지고 있었다. 해방과 함께 일본인이 소유했던 땅은 국가에 귀속되었다.
이후 오랜 세월에 걸쳐 주민들에게 소유권이 이전된 지금은 어느 지역이 방죽 논이었고, 그 규모가 어떠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이제는 방죽 대신 그 기능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 천[수로]이다. 천은 내촌과 외리의 경계 논에서 벽골제 방향으로 조금만 가다 보면 나온다. 동진강에서부터 흘러나온 물길은 정읍 태인을 지나 벽골제를 거쳐서 원평천을 가로 지른다. 성덕면과 광활면까지 농지에 물을 대고 있는 농수로인 것이다. 현재 이 물길은 한국농어촌공사 동진지사에서 관리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인 1925년에 세워진 동진수리조합이 운암댐을 만들어 남쪽으로 흐르던 운암강[현 섬진강]의 물줄기를 꺾어서 동진강으로 보내 금만평야로 흐르게 한 것이다.
한창 추수 중이던 10월의 수로는 바닥이 드러나 있었다. 9월 말부터 벼 수확에 무리가 없도록 물을 가두어 놓은 것이다. 하지만 한 해의 수확을 위해 논에 물을 대는 4월에는 물길이 트여 수로가 가득 찬다.
천은 일제강점기 농지 수탈 역사의 상징인 동진수리조합이 만든 산물이다. 그러나 이 물길이 없었으면 농사짓기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자취를 감추었지만 살기 위해 방죽을 만들던 사람들의 모습이 오버랩 되며 씁쓸함이 몰려들었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