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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6B030202
지역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동곡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진 희

동곡마을 주민들의 종교, 철학, 삶의 모습은 각기 서로 다르지만 이들에게는 미래를 향한‘꿈’이라는 바람이 불고 있는 듯하다. 1980년 동곡마을에 동심원을 조성한 송재욱[1941년생] 씨 역시 이곳에서 자신의 꿈을 건실하게 키워 나가고 있다.

[독도 주민으로 살아가다]

그는 1987년 독도의 유일한 주민이었던 최종덕 씨가 사망해 독도가 무인도가 되었다는 기사를 접하고 서둘러 울릉도로 향해서 당시 호적지였던 전라북도 김제군에서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산30번지로 전적 신고를 했다.

“일본과 영토 분쟁이 있을 때 누군가 그곳에 살았다는 근거가 있으면 아무 소리 못하지 않을까 해서 그래서 했던 겁니다.”

일본과의 영유권 분쟁에 쐐기를 박고 싶은 심정으로 했던 일이었지만 그 과정이 결코 간단치는 않았다. 대대로 도복과 갓을 쓰고 보내는 한학을 하는 집안에서 자란 터라 일부 가족들의 반대도 있었고, 연고 없는 외딴 섬으로 호적을 옮기는 일이 기이한 행동으로 비춰져서 어떤 이들은 사업에 실패해서 도주하려는 것이라고 말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불편한 점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는데, 가령 1987년 대통령선거 때는 부재자투표를 해야 했고, 주민등록초본 등 행정 서류가 필요할 때마다 배를 타고 울릉도까지 내려가야 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1988년 결성된 ‘푸른 독도 가꾸기 모임’ 회원들과 함께 울릉도에서 동백나무와 보리장나무 등을 심는 일을 해오고 있다.

“독도는 협상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우리의 영토입니다. 제 땅을 못 지키고 논란의 대상이 되도록 방치했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라고 말하는 송재욱 씨의 표정에 결연한 의지가 스친다.

[내 땅은 내가 지킨다]

언제부터 그의 인생의 좌우명이 “내 땅은 내가 지킨다.”는 식이 되었는지 정확한 시점은 모른다. 다만 그가 가지는 희망과 확신, 꿈과 소망은 일찍부터 자리하고 있었고 점차 커져 온 것으로 보인다.

어려서부터 그는 역사나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했을 때 그는 조그만 땅덩이에서 벌어지는 지역 차별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고심 끝에 향우회를 조직해서 매일 아침 30분씩 일찍 등교해서 교문 안팎을 청소해 나가는 선행을 벌이자 결국 시골 출신이라고 해서 곱지 않게만 보던 주위의 시선이 거둬졌다.

같은 맥락에서 그는 무엇보다도 선조들이 이룩한 정신적·물질적 유산을 소중히 여기는 일, 그리고 그것들을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일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1978년 서울 종로에 위치한 태화관이 헐린다는 소식을 듣고 그 길로 태화관으로 달려가서 33인의 민족 대표들이 독립선언문을 준비했던 역사의 현장의 주춧돌, 목재, 기왓장을 동곡마을로 실어 오기도 했다.

그에게 나라와 역사는 그를 움직이게 하는 동인이자 존재의 기반이다. 누가 알아주든 말든 간에 그는 오늘도 조국애(祖國愛)의 노를 저어가고 있었다.

[정보제공]

  • •  송재욱(남, 1941년생, 동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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