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A030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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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광활면 옥포리 화양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한천수 |
[대학생이 192명이나 됐어]
이민자들에게 자녀는 미래다. 그래서 바다일도 나가고, 땅도 팔아서 자녀들을 교육시킨다. 가깝게는 김제로, 익산으로, 전주로 학교를 보내고, 멀리는 서울까지 유학을 보낸다. 1960년대에 광활면 주민 중 대학생이 192명이나 있었다고 한다.
“광활이 지금은 광활하면 김제 가서도 부자 동네라고 그러는데, 예전에 우리 학교 다닐 때 여기 대학생만 192명이나 있었어요. 그니까 왜 그런 현상이 났냐 하면 여기가 집이 여섯 개씩 있잖아요. 근데 이 집 아들이 쭉 허니 있는데, 이 집 아들이 대학 보내면, 이 집 아들은 대학 보냈는데, 딴은 안 보낼 수 없고 그래 가지고 논 다 팔아먹은 사람도 있고. [자녀] 대학 갈치니라고 논 5필지[19,834.7㎡] 바친 사람들 많아요. 그때 여기서 살던 사람들은 [상환답으로] 5배미 다 줬거든요. 속담에 ‘누가 거시기 헌게 패랭이 쓰고 구럭지고 시장 따라간다.’고 허는 식으로 말하자면 경쟁 심리 있잖아요.
[나도] 그 당시에 대학 나왔어요. 여기서 우리 또래들 대학 나온 사람들 많았어요. 나 대학 다닐 때, 그때 딴 데에서 사는 경우는 초등학교 못 나온 사람들도 많았어요.
[우리 집은] 작은형님은 이리농림학교를 다녔고, 큰형님은 서울 경기고보[현 경기중고등학교] 나왔고. 그 당시 여기서 서울까지 학교 다니면 ‘서울 가서 학교 다닌다’는 것이 아니고 ‘유학생’이라고 했어. [대학생 192명은] 내 동생이 서울대학교 다닐 때, 그 전후 내 동생 친구들이 그렇게 많았어.
그리고 특히 여기 중앙대 졸업하던 사람이 많아요. 6·25 때 중앙대 분교가 이리[현 익산시]에 있었거든.
그 학교가 그게 동진농업주식회사 본사 그 자리에 피난 왔지. 그래서 전라도 사람들이 중앙대학교 많이 나온 거요. [중앙대학교를 다니던] 우리 또래들은 거시기[이리]에서 2년 다니고, 2년은 서울 가서 다니고, 그래 갖고 광활 사람들이 중앙대학교 나온 사람들이 많아요.”[송수철, 1936년생]
[희망을 꽃피우다]
자녀를 타 지역으로 유학 보낸 부모는 자주 자녀의 자취집을 찾아가 뒷바라지를 한다. 유학이 모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가까이 데리고 있으면서 교육을 시켰어야 하는데’라는 한탄의 목소리도 들린다. 하지만 어려운 유학 생활 속에서 부모의 기대를 실현시키는 자녀들이 화양마을에는 많이 있다.
“[자녀들은] 광활국민학교는 첫째 딸하고, 둘째 딸만 나오고, [국민학교를] 김제로 보낸 놈도 있고, 셋째 딸은 전주에서 나왔고. 중학교는 전주에서 많이 나왔지.
[전주에서] 전부 지들이 자취했지. [전주에서] 둘째 딸 그놈이 욕봤어, [동생들] 도시락을 7개씩 쌌어.
[자취]방은 얻어 주고, 여기서 일 주일에 한 번씩은 전주를 가야 혀. 그때 애들 갈칠 때만해도 여기서 전북여객이 하루에 2번썩 전주까지 노상 다녔거든. [교육비는]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젊어서 [번 돈이] 다 그리 들어갔어. 애들 갈칠 때는 돈 한 뭉치썩 갖고 가서 그렇게 갈쳤네. 여기 사람들 애들 학교 갈친다고 논 팔아 갖고 쓴 사람들 많이 있었어. 우리는 그때만 해도 사업을 해서 갈쳤지, 그렇지 않음 어림도 없어. 농사져 갖고는 절대 못 갈쳐. [당시] 대학교 하나 갈칠라면 논 두 배미[7,933.88㎡], 세 배미[11,900.83㎡] 다 팔아먹었다고.
내가 슬하에 2남 4녀를 뒀어요, 전부 다 대학교 보내고. 큰딸은 익산국민학교에 있고, 둘째 딸은 고등학교 선생, 저그 남편은 원광대 교수, 셋째 딸은 사업을 허고, 넷째 딸도 사업을 허고. 전부 다 애들은 다 잘 풀렸어요. 아들들은 둘이 있는데, 하나는 대전에 있고, 막둥이는 익산에 있어요.”[조용환, 1935년생]
[땅을 팔아서라도 당연히 가르쳐야지]
어려운 시절을 지나온 사람에게 과거는, 자신에게서 종착점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땅을 팔고 빚도 져서라도 자녀를 교육시키는 가장 큰 이유이다.
“[자녀는] 2남 6녀여, [많이] 못 가르쳤어요. 고등학교는 다 나오고, 대학교 둘 나오고. 그때만 해도 갈친 사람이 없어. 우리 딸만 해도 여그 화양2구서 [고등학생이] 하나 될동말동 했어. 그때는 그렇게 안 보냈어요. 국민학교도 못 보낸 사람도 있어. 우리 애들은 할아버지 덕으로 다 고등학교 대학교 나오고. 식구는 많아도, 이리여고도 나오고, 전주여고, 기전여고. 부자는 아니라도 그대로 그대로 다 살어. 빚도 짐서 갚음서 살아도 찔찔 매면서는 안 살았어요.”[김성문, 1925년생]
부모는 교육을 통해 자녀에게 자신의 삶을 투영시키고, 자녀는 부모의 기대를 버거워하여 놓거나 극복하여 자신의 삶으로 만든다. 광활에는 부모의 어려운 시절을 보고 자란 자녀가 대부분이다. 이들은 부모의 기대를 안고 유학하였고, 현재는 안정적인 직업을 갖고 타지에 정착한 사람들이 많다.
“큰딸 대학을 안 나오고 다 대학을 나왔어요. 둘째 딸도 대학 나왔고, 셋째 딸은 공부 잘해서 중학교 선생허다가 결혼허고 그만뒀어. 넷째가 아들이지. 대학교 나와 가지고, 지가 문부성 장학금 받어 갖고 일본 가서 거시기[박사 학위]를 땄어. 지금은 대학교 교수허고, 몸이 약혀서 걱정여. 다섯째는 또 딸이지. 거그도 대학 나오고, 여섯째도 대학 나오고. 막둥이가 아들인디, 대학 나와서 경기도에 있다가 시방 전주로 이사 왔어요.
시방 이 광활서도 판·검사허는 사람도 있고, 의사허는 사람도 있고, 잘된 사람들 많어. 근게 이렇게 이민을 온 게 짜란히 쭈욱 허니 다섯 집을 지어 가지고 살면서 근게 막 성지간 같이 지냈어, 타향서 와 갖고 지낸게. 대문도 없고, 막 동기간같이 지냈어, 그렇게 인심이 좋았어. 근게 ‘너도 보낸게 나도 보낸다’ 근디 엄청 없는 사람들은 [학교를] 못 보내고.”[홍향림, 1930년생]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