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A030102 |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광활면 옥포리 화양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한천수 |
일제강점기 화양마을이 자리한 광활면 교육은 사립학교, 간이학교, 야학, 서당 등 4가지 유형이 있었다.
그 중 정기적이고 오랫동안 지속된 것은 1934년에 설립된 사립학교로 3년제였다. 사립학교는 해방 후 광활초등학교의 전신이 되었다.
맨 처음 교사로 초빙된 분은 고문선 씨였고, 주로 가르친 과목은 한국어, 일본어, 한문, 산수 등이었다.
고문선 씨는 사립학교를 다닐 수 없는 여성들을 위해 야학도 운영하였다. 간이학교는 1931년 부임한 우가키 총독이 고안한 식민지 교육 정책의 일환으로 설립되었으며, 광활면에는 1937년에 2년제로 설립하였고, 주로 가르친 과목은 일본어였다.
[그래도 많이 배웠어]
“우리 아버지는 1903년생. 고향은 김제 백산 석교리 전석마을. 아버지 호적 이름은 고문선(高文善). 호는 지선(芝善). 왜정 시절에 김제에서 보통학교를 다녔어요. 우리 아버지가 영리허셔 가지고 보통학교만 나왔어도, 고향에 계심서도 야학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허고 그렸다네요.
여기를 오게 된 동기는 여기가 동진농업주식회사에서 경영하던 간척지거든요. 그래서 학교가 없었어요. 난중에사 저짝에가 간이학교가 있었어요.
일본 사람들이 ‘가르쳐야 헌다, 배워야 헌다’ 그래 가지고 사립학교를 설치를 혔어요. [우리 아버지가] 여그 선생으로 오시는 과정은 우리 외갓집 어른이 발은 놔줘 갖고 그래 갖고 오셨어요. 우리 외갓집 어르신도 여기 [이민]와서 농사짓고 사신 양반요. 그때는 1농구, 2농구, 3농구 그렸거든요, [사립학교는] 2농구에서 추진을 혀 가지고, 조그만허게 설치를 혔어요. 그래 가지고 ‘가르칠 선생이 있어야 헐 것이 아니냐.’ 그런게로 우리 외갓집 아저씨가 우리 아버지를 추천을 혔어. 추천을 혀서 오셔 가지고서 그때부터 사립학교 선생님으로 계셨었어요. 그런게 아버지 개인 재산으로 학교를 설치헌 것이 아녀요. [아버지는] 농사를 안 지었지. 이 자리가 학교 자린디
[아버지가] 야학도 혔대요, 여자들 야학. 사립학교는 이짝에 있고, 간이학교는 저짝에가 있었어요. 근디 간이학교는 없어져 버리고 여기는 남았었죠. 그래 갖고 해방되고 국민학교를 세웠죠.
나도 [사립학교에서] 아버지한테 조금 배웠어요. 여기서 아버지한테 조금 배우다가 내가 진봉학교[현 진봉초등학교]를 다녔어요. 우리 아버지는 3학년까지 밖에 안 가르쳐. 그러니까 3학년을 배우고서 더 배워야 허는디, 저 진봉학교는 6학년까지 있어서 그려서 거기를 다녔죠. 거기는 공립학교였거든요. 거기 들어가기를 3학년으로 들어갔어요. 진봉학교까지 십 리가 넘는 디를 걸어서 다녔어요. 진봉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로 전주농업학교를 갔어요.
근게 [아버지는] 교육계로만 오래 계셨는데, 처음에 공립학교가 아니라 사립학교를 운영을 했어요, 광활면에서.”[고석원, 1928년생]
“나는 광활에서 태어나서 광활에서 컸어. 여기가 개간혀 갖고 살다 살다 못 사는 사람들만 이민을 왔어요. 태어나기는 3답구에서 태어나서 [결혼 후] 오기를 여기 6답구로 왔어요. 그때는 거기[3답구에] 저수지 있었거든.
[공부는] 이 자리에서, [여기가] 사립학교 자린디, 그때 시아버지한테 배웠어요. 나 여기 3학년밲이 안 다녔당게.
[결혼은] 중매죠. 그전에는 연애허는 시상이간디. 근게 연애는 안 혔어도 [고문선 선생님의 아들인 남편을] 알았죠. [그래도] 중매는 혔어. 시아버지가 나를 이쁘던 안 혀도 머리가 좋고 차분헌게, 2세를 생각혀서 [결혼을] 허자고.”[홍향림, 1930년생]
[조선말 못하게 서로 감시했지]
일제강점기 이민자의 자녀들은 주로 사립학교와 간이학교를 다녔는데, 대부분의 정규 교육은 이 학교를 졸업하면서 마쳤다. 하지만 일부는 6년제인 진봉국민학교에 편입하여 다니기도 하였다.
진봉국민학교에서는 일본어 사용을 강요하면서 조선어 사용을 엄격하게 금하였다. 일제강점기 진봉국민학교를 다닌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조선어를 사용하는 학생을 감시하고 적발하기 위하여 학생들끼리 서로 감시하는 게임을 하였다고 한다.
야학과 서당은 정기적이지 않고, 주로 농한기에 이루어졌다. 서당은 간재(艮齋) 전우(田愚)[구한말 유학자, 1841~1922]의 제자인 고창 성내 출신의 동호(東湖)라는 분이 운영하였다.
“[학교는] 일곱 살 때, 나 일찍 갔어요. 학급 중에서도 제일 어렸었지. 이 광활면에서 꼭 서이[3명] 다녔어. 그때는 진봉공립보통학교를 나왔는디, 그 뒤에 심상소학교네, 뭔 국민학교네, 학교명이 쭉 바뀌드만.
진봉학교는 4년제였어, 그러고 2년은 어디로 갔는고니 만경으로 2년 가서 배운 거지. 나중에 6년제로 되어 갖고. 6학년 2학기 때 농사철인데, 우리 아버님이 병환이 나셔서 영농을 못하게 된게, 내가 영농을 보살피야 허게 생겨서 정학을 했어. 쭉 학교를 못 가다가 3년 후에 내가 복학을 혔어. 15회 졸업을 했지. 원래는 11회가 되어야 허는디.
한학 조금 했죠, 몇 달간씩. 주로 겨울에 했지. [가르친 분은] 동호 선생인데, 그 양반이 고창 성내면서 이리 오셨는데, 그 양반 선생은 전우 간재 선생여. 두 차례 배웠는데, 처음에는 어렸을 적에 배웠고, 나중에는 나이 먹어서 20대에 배웠고, 6개월씩.”[김성문, 1925년생]
“내가 1937년 월촌서 와서 진봉공립국민학교 댕기고 헐 때, 한 달에 한 번씩 월사금을 가지고 가. 월사금을 못 내면 집에 가서 갖고 오라고도 하고, 선생들이. 학교는 일본말 못 허면 경합을 많이 시킨 것여, 그때. 조선말을 못 허게 허고, 일본말로 허기로 허고. 조선말 하게 되면 표가 있어, ‘후다도리’라고 표를 뺏는 것여. 우리 학교 다닐 때만 해도 일본말을 안 하면 탄압이 많이 있었지.”[조연식, 1927년생]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