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A030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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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광활면 옥포리 화양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한천수 |
현재 화양마을이 자리한 광활면은 면소재지를 제외한 대부분의 마을이 5가구 1개 반을 구성하고 있다. 광활의 마을은 일제강점기 농지와 소작인 관리에 용이하도록 논 가운데 형성되었는데, 현재도 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광활면의 중심지 화양마을]
‘화양1구’와 ‘광활’은 일제강점기 5답구로 불리며 1930년 80세대가 이민을 들어오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동진농업주식회사 직원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어서 광활면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1945년 해방 후 일본 사람들이 물러간 후에는 각종 기관과 상가가 입주하면서 면소재지로 변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여기는 전부 일본 사람들이 살았거든요. [화양1구와 광활] 옛날에 여기 한 부락였어요. 해방되고 ‘화양마을’이라고 안 하고, 그때 외지 사람은 여기를 뭐라 했냐면 ‘간사지 사람들이다’고 얘기 허니까 이것을 고친다고 고친 것이 ‘화양’이라고 불렀고, 여기가 화양1구 부락이었어요, 몽땅. 근데 광활 전체가 10개 부락이잖아요, 그때는 여기를 소재지라고 했어. 근데 [인구는 많고] 부락이 [수가] 적다 그니깐 반절씩 쪼갰다 하더라고.
그래 갖고 2개 부락이 된 거에요. 그래서 이장도 2명으로 늘어났지.”[송수철, 1936년생]
이 마을은 ‘땅이 기름지다’는 의미로 ‘화양’이라 불렀는데, 인구가 증가하면서 1981년 행정구역 조정으로 화양1구와 화양2구로 나뉘었고, 다시 화양1구에서 광활마을이 분리하여 두 마을이 면소재지를 형성하고 있다. 화양1구와 광활은 면사무소 앞 [중앙]도로를 경계로 구분된다. 이장을 비롯한 마을 조직은 따로 있지만, 주민들은 화양1구와 광활을 다른 마을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게[화양1구와 광활] 한 부락이었는데, 갈랐어. 광활면이 원래 10개 부락이었어. [그런데] 면 단위로 손해가 나서 20개로 만들었어. 각 부락을 반절썩 쪼개 갖고 다 갈라 놔서 [현재] 20개 부락여. 20개 부락을 해야 정부에서 이장 봉급이 나오잖아. 하나라도 더 만들어 놔야 혜택이 있단 말여. [이장 봉급이] 한 달에 25만 원 이상 나오잖아. 예전에는 구장질 허면 나락 때 나락 한 말, 보리 때 보리 한 말 그거 주고 말았거든. 그렇게 받고 이장을 했어.”[이순구, 1931년생]
“화양1구가 [마을] 중앙도로를 혀 가지고 저짝으로 광활마을, 원래 여기를 화양1구로 만들었는데, 행정상 이름을 갈랐어.
[이장은] 원칙은 2년, 김제시만 그렇더만. 김제시 조례법에 의해서 2년간 자치회장[이장]을 해 갖고 아무런 사고 없이 부락민들에 헌신 봉사헌다 헐 정도로 되면, 다시 재임을 허면 4년까지 헐 수 있고, 2년까지 혀 가지고 불신을 받는다면 쉬는 거고. 나는 금년에 지금 3년째, 한 해 더하면 4년째, 다시는 더 못하지. 내가 젊었을 때 딱 1년간 이장을 한 번 해 봤지.
전체 2부락을 합친 부락일 때 이장을 해 봤지. 20개 부락 이장단 회의는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회의를 하지. 그리고 나는 3년째 노인회장도 맡고 있어.”[조용환, 1935년생]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