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A010205 |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광활면 옥포리 화양마을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문예은 |
[다시 둑을 쌓다]
1952년 9월 4일에 불어닥친 태풍으로 광활방조제가 무너져서 논이 물에 잠기자 주민들은 농토를 되찾기 위해 공사를 추진했다.
방조제가 터졌을 당시 논에는 벼들이 고개를 숙이고 수확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대동공업사를 축으로 각 지역에서 인력을 동원하여 방조제를 수리하는 공사를 시작했다. 일단 신작로를 기준으로 둑을 막았다.
빠른 시간 안에 공사를 시작해서인지 둑이 무너진 후 1년 만인 1953년에 둑을 완성할 수 있었다.
바닷물이 사라지고 난 논은 원래 주인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논에서는 평소 수확량보다 적은 쌀이 나왔다.
수해 피해를 만나지 않은 사람들은 평소와 같이 많은 쌀을 거둘 수 있었다. 수해를 만나 논이 바닷물에 잠겨 버린 사람들은 수해 때문에 수확량이 적었다는 것 말고도 또 다른 고비를 넘겨야 했다. 다시 논에 들어온 바닷물이 남긴 염기가 그것이다. 그동안의 용·배수 관리를 통해 빼둔 염기가 둑이 터지면서 다시 올라왔던 것이다.
평소의 반도 나오지 않는 수확량 때문에 사람들의 식량도 부족했다. 쌀을 한 짝 빌려 먹으면 두 짝으로 갚아야 했기 때문에 힘든 생활이 계속 되었다. 그래서 지금이면 족히 7천만 원은 받을 수 있다는 논 한 배미를 당시 쌀 두 가마니를 받고 팔았다. 생각만 해도 서럽고 원통한 그때의 기억이지만 먹고살기 위해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한다. 수해를 만나지 않은 사람들은 그네들의 땅을 사서 부자가 되기도 했다.
[두 손 놓고 땅을 잃었지]
그렇게 터진 둑은 1차 방조제 공사가 완성되면서 정리가 되었지만, 아직 원 농토는 찾지 못한 상태였다. 신작로 밑으로 총 450정보의 땅이 바다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바다에 묻혀 버린, 25년 동안 논이었던 곳에서는 몇 번의 조수로 인해 다시 맛과 조개가 자라기도 했다.
기존에 조금 터져 있던 제방이 파도에 의해 점점 더 크게 터져 나갔기 때문에 두 번째 공사는 첫 번째와 다르게 규모가 굉장히 컸다.
제방을 막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했다. 결국 2차 공사는 주(株)를 모집해서 돈을 마련하기로 했다. 주 대표위원장에는 김재근 씨, 부회장에는 신진욱 씨, 석일용 씨를 비롯하여 총무와 경비로 구성된 위원회가 모집되었다. 그들은 당시 정미업, 양조장, 버스업을 통해 사업에 성공한 마을 사람이었기 때문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믿음을 갖고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땅을 개간하고 경지 정리를 한다 해도 잘되는 자리가 있고, 그렇지 못한 자리가 있는 법이다. 그래서 땅을 A, B, C로 나누어 주를 받았다. 제일 좋은 논인 A구역은 쌀 열 짝, 그 다음은 B구역으로 일곱 짝, 그 다음은 C구역으로 세 짝을 받는 식으로 등급을 규정하여 모집을 했다. 순창, 군산, 임실, 서울, 경기도 각 처에서 새롭게 주를 들어 이사를 왔다.
1차 제방이 완공되고는 본래 논 주인이 땅을 찾을 수 있었지만, 2차 제방이 완공된 후 기존의 논 주인들은 그저 자신의 논이었던 곳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주를 모아서 땅을 닦았기 때문에 주를 댄 새로운 사람들이 주인이 된 것이다. 그들 중에는 자기 논을 다시 구입한 사람도 있고, 여기서 이렇게 땅을 뺏기고는 못 산다고 떠나 버린 사람도 있었다.
땅이 없더라도 일단 이사부터 오는 사람도 많았다. 논이 넓고 노동력이 많이 필요한 농사일에 매진할 때라 남의 집 머슴을 살다가 새경[머슴이 주인에게서 한 해 동안 일한 대가로 받는 돈이나 물건]을 받아 저축하면, 그것으로 논을 사서 재산을 불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주를 받아 자금을 마련하여 공사를 실시하였고, 1963년 2차 제방이 완성되었다.
마침내 처음 간척했던 땅을 되찾게 된 것이다.
[새로 품종 실험도 많이 했어]
이리농업시험장 이 들어선 것은 2차 방조제 공사가 한창이던 1960년이었다.
이리농업시험장에서는 성공적인 수확을 위하여 종자를 채취하고, 토질 검사를 시행했으며, 염에 강한 품종 실험을 했다.
1960년에 스물세 살이었던 최성진 할아버지는 이곳에서 약 5년간 일을 했다. 한 필지를 오십 평 정도의 단위로 칸칸이 막아서 여러 종자를 심어 염기에 강한 종자를 찾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같은 환경 조건을 만들어 주기 위하여 비료 하나하나 전부 무게를 측정하여 일정량을 맞췄으며, 물 관리 또한 엄격하게 했다.
이리농업시험장은 여러 시험을 거치며 종자를 선택하여 나눠 주고, 배양하는 역할을 하다가 1970년대 중반에 없어지게 되었다. 최성진 씨는 당시 거기에서 일하던 기억이 남아 있어 부서진 건물의 간판을 가져와 집에 간직하고 있다. 현재 그 자리에는 농업협동조합 건물이 들어서 있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