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017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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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碧骨堤長生渠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부량면 신용리 199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정은주 |
성격 | 관개시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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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시기/연도 | 삼국시대 |
소재지 주소 | 전라북도 김제시 부량면 신용리 199 |
문화재 지정번호 | 사적 제111호 |
[정의]
전라북도 김제시 부량면 신용리에 있는 삼국시대의 벽골제 제2수문.
[개설]
벽골제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쌓아 만든 저수지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330년(신라 흘해왕 21)에 처음으로 벽골제를 만들었는데, 둘레가 1천 8백 보”라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이 지역이 신라 땅이 아닌 백제의 땅이었으므로 나중에 연도를 고쳐서 신라가 만든 것처럼 해놓았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벽골제가 축조된 때는 330년(백제 비류왕 27)으로 보고 있으며, 790년(원성왕 6)과 고려 현종 때 및 1143년(인종 21)에 고쳐 쌓은 후 1415년(태종 15)에 다시 쌓았다. 현재는 길이 약 3㎞ 정도의 둑만이 남아 있다. 1925년 동진토지개량조합에서 이 둑을 농사짓는 데 필요한 물을 대는 통로로 고쳐 이용하면서 원형에서 많이 변형되었다.
둑의 북쪽에는 조선시대에 벽골제를 다시 쌓고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 있는데 닳아서 명문을 알아보기는 어렵다. 1975년에는 저수지 물의 양을 조절하던 수문이 있던 자리 2곳을 발굴 조사하였으며, 그 결과 벽골제가 높은 수준의 측량 기술이 이용된 대토목 공사였음이 밝혀졌다.
1415년(태종 15) 장생거의 보수기록에 의하면, 양쪽의 석주심(石柱心)이 움푹 들어간 곳에는 느티나무 판을 가로질러서, 내외로 고리와 쇠줄을 달아 나무판을 들어올리면 물이 흐르도록 하였으니, 수문의 너비는 모두가 13자[약 393.9cm]이요, 돌기둥의 높이는 15자[약 454.5cm]이며, 땅속으로 5자[약 151.5cm]나 들어가 있다. 또 아래의 석봉(石縫)은 쇠를 녹여 땜질을 해서 단단하게 하고, 다시 안쪽의 물을 막고 있는 언덕도 보수하였다.
[위치]
벽골제 장생거는 현재 전라북도 김제시 부량면 신용리 용골마을에서 약 500m 떨어진 제방에 위치하고 있다.
[현황]
벽골제의 수문은 원래 수여거, 장생거, 중심거, 경장거, 유통거 등 5개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둑의 한가운데를 파서 수로를 만들면서 둑은 둘로 잘려졌고, 수문도 사라져 현재는 장생거와 경장거의 돌기둥만 남아 있다. 장생거는 두 기의 석주가 나란히 세워져 있어 제4수문인 경장거와 모습이 유사하다. 두 개의 돌기둥 사이에 하단에 굵은 나무판자가 끼워져 있다. 과거 현존 나무판자와 같은 판자 여러 개를 쌓아 수문을 만들어 위 아래로 움직이며 물의 유입량을 조절하는데 사용하였다.
[의의 및 평가]
장생거는 우리나라 최초의 저수지인 벽골제의 수문으로 당시에 이미 이러한 저수지 축조가 가능할 정도의 고도로 발달된 토목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입증해 준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과학기술사에서도 획기적인 사실을 제공해 주는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