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017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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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全義李氏 |
영어의미역 | Jeonui Yi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제월동 |
집필자 | 김병학 |
세거지 | 전라북도 김제시 제월동 월랑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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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성촌 | 전라북도 김제시 제월동 |
입향시기/연도 | 1517년경 |
성씨시조 | 이도 |
입향시조 | 이계맹 |
[정의]
이도를 시조로 하고, 이계맹을 입향조로 하는 전라북도 김제시 세거성씨.
[연원]
전의이씨(全義李氏)는 왕건이 후삼국을 통합할 때의 공으로 삼한개국공신으로 책봉되고 삼중대광태사의 벼슬에 올랐던 이도(李棹)를 시조로 하고 있다. 이도가 전의(全義)[지금의 충청남도 연기군]에 살았고, 개국공신으로 전산후(全山候)에 봉작되어 전의현(全義縣) 일대를 식읍으로 하사받았기 때문에 후손들이 전의(全義)를 본관으로 하였다.
[입향경위]
전의이씨의 김제 입향조 문평공(文平公) 이계맹(李繼孟)[1458~1523]은 시조 이도의 15세손이다. 이계맹은 1483년(성종 14)에 사마양시(司馬兩試), 1489년(성종 20)에 문과에 급제하여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를 시작으로 승문원검교, 사간원정언에 이어서 교리, 당상관인 통정대부에 올라 동부승지와 좌승지를 역임하였다. 그러나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사화에 연루되어 영광에 유배되었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으로 다시 등용되어 대사헌·경기감사·전라감사·평안감사·호조판서·예조판서·형조판서를 역임하고 간당의 음해와 미움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났다. 1519년(중종 14) 의정부좌찬성에 임명되어 겸춘추관, 세자이사(世子貳師)에 임명되었다. 특히 종계변무사와 중궁 책봉의 주청사로 명나라에 들어가 종계를 바로 세우고 중궁 책봉을 인정받아 돌아오니 많은 농토와 노비를 하사받아 제월동 일대가 사패지지(賜牌之地)가 되었다. 1523년(중종 18) 66세에 병사하였으며, 용암서원에 배향되었다.
[현황]
이계맹이 많은 농토와 노비들을 하사받아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시 제월동에 세거한 뒤 후손들이 번창하여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고, 김제시 제월동에는 이계맹의 유허비와 비석 등이 있다. 후손으로는 이계맹의 장남으로 동부승지를 지낸 이침(李沈)과 이계맹의 14세손으로 공조참판을 지낸 이희협(李熙拹) 등이 있다.
[관련유적]
전라북도 김제시 제월동 월랑마을에 이계맹 유허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