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017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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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兵曹判書-三國政丞 |
영어의미역 | Pool Prime Ministers of Three Nations and the Minister of War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
집필자 | 이윤애 |
[정의]
전라북도 김제시에서 얼치기 병조판서와 삼국정승에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채록/수집상황]
전라북도 문화관광정보[http://www.gojb.net/]에서 전라북도 지역의 전통문화에 관한 문화재자료를 소개하고 있는데, 「얼치기 병조판서와 삼국정승」은 전설·시 부분의 전설 부문 김제시 편에 실려 있다. 전라북도 김제시 백구면 반월리 주민 이수산이 구연한 것을 채록한 것이다.
[내용]
옛날 어떤 남자가 부모는 물론 할아버지까지 모시고 살았는데, 먹고 살 길이 없어 밤낮으로 굶었다. 남자는 남의 심부름이나 해 주고 다니는 종이었는데, 날마다 무슨 장사를 해야 먹고 살 수 있을까 하고 돌아다녔다. 종은 종끼리 친구를 한다고, 친구는 소주 집 종 노릇을 하고 남자는 밥 하는 집 종으로 가 살면서 어머니와 아버지, 할아버지를 모시며 고생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할아버지가 죽어 남자는 송장을 보릿대 방석으로 둘둘 말아 짊어지고 뒷동산으로 올라갔다. 할아버지를 묻으려고 땅을 파는데, 갑자기 동산 밑에 사는 박씨라는 사람이 달려와 뭐하는 짓이냐며 따져 물었다. 남자가 할아버지를 묻으려고 판 땅은 박씨가 공력을 들여서 신후지지(身後之地)[생전에 미리 장만한 묏자리]로 마련한 곳이었다. 자신이 공들여 장만한 묏자리를 종놈이 할아버지 송장을 묻으려고 파고 있으니 놀라 쫓아온 것이었다.
“야, 이놈아! 저만큼 갖다가 묻지 허고 많은 땅 다 놔두고 왜 남의 자리를 들쑤시고 난리냐?” 이렇게 호통을 치니 남자는 그저 만만하게 박씨를 보고 있다가 사방을 둘레둘레 돌아보더니 그 위쪽으로 올라갔다.
내려가기는커녕 위로 올라가면 바로 당대 병조판서가 나오고, 그 밑으로 가면 겨우 진사 급제밖에는 못하는 자리였다. 그걸 몰랐던 박씨는 그저 신후지지만 지키고, 남자를 병조판서가 날 자리로 쫓아 보낸 것이었다. 박씨가 남자를 따라 올라가 보니 남자가 파고 있는 곳은 과연 명당자리였다. ‘허. 여기가 이렇게 생긴 땅이었구나. 이런 명당자리를 코앞에 두고 알지 못했다니.’
박씨는 남자를 쫓은 걸 후회하였다. 도로 아래에 가서 파묻으라고 하고, 자기 아버지를 그 자리에 묻고 싶었지만 남자가 그렇게 해 줄 리는 없었다. 그러나 그곳은 철관도사가 하관을 해야 터가 사는 자리였다. 철관도사는 말고라도 관도 없이 밑대방석으로 송장을 싸 가지고 묻으니 다 헛짓에 불과하였다.
남자가 한참 동안 구덩이를 파서 이제 송장을 묻으려고 하는데, 마침 친구인 소주 집 종이 그곳을 지나갔다. 예전에는 큰 솥뚜껑으로 덮어 놓고 소주를 내렸는데, 소주 집 종은 소주를 내리려고 솥뚜껑을 들고 가고 있었다. 솥뚜껑이 어찌나 크던지 너무 무거워 소주 집 종은 다리에 솥뚜껑을 세워 놓고 막대기로 ‘댕 댕 댕 댕’ 치며 말하였다. “너 뭐하냐?” “우리 할아버지가 죽어서 지금 여기다 묻는다.” “그럼 잘 묻고 와라. 나는 심부름 가야 하니까 빨리 가야겠다” 하면서 친구는 다시 솥뚜껑을 ‘댕 댕 댕 댕’ 때리며 산을 내려갔다.
그러니까 남자가 할아버지를 묻을 때 친구가 솥뚜껑을 때린 게 결국 철관도사가 하관을 한 꼴이 된 거였다. 또 널은 금색이 도는 것으로 해야 한다고 했는데 밑대방석이 번쩍번쩍하니 황금과 같은 꼴이었다.
이후로 시간이 흘러 남자의 아버지는 소금장사를 하며 살았고, 남자의 아들은 남의 집 종으로 살고 있었다. 당시는 한국과 중국이 서로 형제국이라 하여 중국 사신이 오면 사신맞이를 내보내게 되어 있었다. 마침 중국에서 사신이 와서 사신맞이를 나가야 했는데, 두 치 도복을 입은 키가 조그마한 만암 이정승이 사신맞이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키가 작은 이정승이 사신맞이를 하면 중국인들이 얕잡아본다며, 풍채 좋고 인심 좋아 보이는 소금장수 즉 남자의 아버지를 사신맞이로 보냈다. 그런데 소금장수는 벼슬아치의 일은 아무것도 몰랐다. 그저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중국 사신이 도착하였다는 말을 듣고 소금장수가 사신맞이로 막 나가려고 하는데, 마침 조수물이 들어와 한강이 의주 압록강처럼 가득 차 출렁출렁하였다. 사람들은 강을 건너갔다 건너오려면 위험할 테니 그냥 건너갈 것 없이 이쪽에서 사신맞이를 하기로 하였다. 그러니까 저쪽 중국 사신은 그냥 저쪽 가장자리로 나오고, 이쪽 소금장수는 그냥 이쪽 가장자리에 세워 놓은 것이었다.
중국 사신은 저쪽에 있는 한국 사신이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놈인가 알아보려고, “네가 염지 신농씨를 아느냐?” 하고 물으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소금장수는 옷은 활옷 능라금수로 입은 채, 고기를 잘 먹어 배가 불러 그저 수염만 쓰다듬고 앉아 있었다. 배가 불러 앞가슴을 끄르고 배를 쓰다듬는 꼴이 “나는 배가 불러 좋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는데, 이 모습이 중국 사신의 눈에는 “나는 태고 복희씨까지 안다” 하는 걸로 보였다. 중국 사신은 그대로 꼬리를 내리고 도망가 버렸다.
이렇게 소금장수는 사신맞이를 무사히 마치게 되었는데, 그게 다 명당자리를 잘 써서 그렇게 된 것이었다.
한편 만암 이정승은 자신이 사신맞이에서 제외된 게 절통하고도 분하였다. “내가 정승인데도 불구하고, 키가 작다는 이유로 업신여기고 소금장수 놈을 갖다가 사신맞이를 시켜?” 이정승은 장안에서 제일 큰 항아리 하나를 빌려 와 항아리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항아리 속에서 ‘우르르 쾅쾅’ 천둥 치는 소리가 났다.
이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란 장안 사람들은 어디서 나는 소리인가 궁금해 하였다. “이게 뭔 소리냐?” “만암 이정승이 사신맞이 안 시켰다고 지금 항아리 속에서 통곡한답니다.” “어허! 큰일났구나. 키가 작고 크건 간에 새 달에는 이정승을 사신맞이로 보내야지. 가짜로 사신맞이 하다가 까딱하면 벌받겠구나.”
이리하여 그 다음 사신맞이는 만암 이정승이 나가게 되었다. 이정승은 신 안에 솜을 한 뭉치 넣어 키를 키운 데다 갓까지 쓰고 나가 사신맞이를 하였다. 중국 사신이 저쪽에 앉아 있다가 바라보니 사신맞이 하러 나온 사람이 키는 조그마해도 삼국정승은 해 먹고 살겠다 싶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키가 한 서너 치만 작으면 삼국정승감인데, 키가 서너 치가 커서 일국정승, 소국정승을 하고 사는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중국 사신은 이정승에게 “그대가 키가 서너 치만 작았으면 삼국정승을 살아 먹을 텐데 키가 어중간히 서너 치가 크기 때문에 소국정승을 하고 사는 거다” 하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들은 이정승이 신을 벗어 땅에 툭툭 터니 안에서 솜뭉텅이가 쏙 빠져나왔다. 이정승 키가 도로 작아져 삼국정승감이 되니, 중국 사신은 다시는 한국으로 사신을 오지 않겠다며 무서워서 도망을 쳤다.
[모티프 분석]
「얼치기 병조판서와 삼국정승」의 주요 모티프는 ‘명당의 획득’과 ‘얼치기 병조판서가 된 소금장수’이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별로 탐탁하지 못한 사람을 얼치기라고 한다. 가난한 종의 신분이었지만 할아버지의 유언대로 명당 터에 자리를 잡았다가 풍신이 좋은 소금장수 아버지가 얼치기 병조판서가 되어서 중국 사신들과 대담을 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중국 당나라 때 이후, 우리나라에서도 관리를 등용하는 시험에서 평가 기준은 신언서판(身言書判)이었다.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도 풍채와 용모가 뛰어나지 못하면 평가받기 어려웠던 것이다. 풍채 덕분에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얼치기 병조판서라도 해 볼 수 있었다는 풍자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