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017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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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先達-李氏 |
영어의미역 | Lee Who Took Up Two Wives and a Seondal Positoin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윤애 |
[정의]
전라북도 김제시에서 두 아내와 선달벼슬을 얻은 이씨에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조선시대에 무과 출신이면서 임관되지 못하고 자리가 날 때까지 대기하는 사람들에게 선달이라는 호칭이 붙여지게 되었는데, 「두 아내와 선달벼슬을 얻은 이씨」는 변변치 못한 사람이지만 그 마음 씀씀이에 감동하여 선달벼슬이라도 하게 하여 명문가를 이루게 하였다는 이야기이다.
[채록/수집상황]
벼고을농경문화테마파크[http://tour.gimje.go.kr/]의 ‘문화재 풍속’ 부문과 ‘전통 풍속’ 부문에 이정기[남, 87세]가 구연한 것을 채록한 내용이 실려 있다.
[내용]
태조가 조선을 건국한 이후 전주이씨(全州李氏) 중 한 사람이 서울에 가서 정승이 되었다. 정승은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정승을 할 수 없게 되자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주려 하였다. 그러나 아들이 부족한 사람이라 어쩔 수 없이 시골로 내려와 농사를 짓게 하였다. 시골 살림의 빈곤함으로 장가도 못 보내고 있는 판에, 서울의 한 정승은 딸을 결혼시키지 못하고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하루는 서울의 정승끼리 앉아서 이야기를 하다가 시골로 부족한 아들을 데리고 내려간 정승 이야기로 확대되었다.
이에 서울의 정승은 혼기를 넘긴 딸을 시골로 간 정승의 아들에게 결혼시켰다. 그러나 시골로 시집온 정승의 딸은 시집의 가난에 못 이겨 남편 이씨를 서울의 친정으로 보내 도움을 구하였다. 이에 장인은 돈 5냥을 주고, 장모는 돈 30냥을 사위에게 주어 땅이라도 사서 지어 먹도록 하였다.
부인의 친정에서 35냥을 얻어 가져온 이씨는 돌아오는 길에 청년들이 여인 1명을 둘러싸고 돌팔매질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이씨가 웬 여자 한 명을 사내들이 이리도 욕보이냐며 따져 묻자 청년들은 여사당을 35냥 주고 샀는데, 소리도 하지 않고 손님도 받지 않아 돈을 낭비하게 생겼다고 불만을 털어놓는 것이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이씨는 30냥에 여사당의 몸값을 지급하고 여사당을 청년들로부터 구해 주었다.
다시 이씨는 집으로 돌아가는데, 여사당이 계속 이씨를 뒤따라 왔다. 이씨는 나흘째 되는 날 양품산 네 집에 밥을 얻으러 들어갔다. 마침 양품산의 딸이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이를 우연히 듣게 된 여사당은 글공부를 가르치는 선생이 자질이 없다고 중얼거렸다. 이에 여사당과 이야기를 해 본 양품산은 여사당의 학식을 간파하고 여사당에게 이튿날부터 자신의 딸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였다.
양품산 집에 머물게 된 여사당은 낮에는 양품산의 딸을 가르치고, 저녁에는 이씨와 한 방에 머물며 부부의 정을 맺었는데, 시골 남자의 학식이 부족한 것을 알고 열심히 가르쳐 서울 동대문 안 큰 정승 집에 들어가 자신이 손수 쓴 편지를 전달하도록 하였다.
서울에 도착한 이씨는 동대문 안 큰 정승 집에 도착하여 여사당의 편지를 정승에게 전달하였다. 편지를 통해 정승은 처남이 자신의 딸을 여사당에 팔아먹고, 자신의 딸을 이씨가 구해 주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승은 자신의 여식을 구해 준 이씨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글이 짧아 벼슬은 시키지 못하는 대신 선달 자격을 주었다. 이 선달의 후손들은 지금 전주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모티프 분석]
「두 아내와 선달벼슬을 얻은 이씨」의 주요 모티프는 ‘여사당을 구해 준 이씨’와 ‘선달벼슬을 얻게 된 이씨’이다. 조카를 사당패에 팔아넘긴 삼촌을 응징하고, 실력은 없지만 마음이 착한 이씨는 선달이라는 직책을 받고 1명의 부인을 더 얻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로, 권선징악적인 결말을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