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01715 |
---|---|
한자 | 浮雪居士-妙花婦人 |
영어의미역 | Monk Buseol and His Wife Myohwa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성덕면 성덕리 고현 |
시대 | 고대/삼국 시대/백제 |
집필자 | 이윤애 |
[정의]
전라북도 김제시 성덕면 성덕리 고현에서 부설거사와 묘화 부인에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부설거사와 묘화부인」은 삼생연분(三生緣分)의 부설(浮雪)을 만나서 말을 하게 된 묘화(妙花)의 부부 운명담이며, 속세를 떠나지 않고도 불법의 진리를 깨달았다고 하는 부설의 재가성도담이다.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중계리에 있는 월명암에 현재 소장되어 있는 「부설전(浮雪傳)」[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40호]이 유일한 한문 필사본이다. 부설의 설화가 문자로 정착되면서 승전형식(僧傳形式)의 「부설전」으로 정리되는 한편 구비로도 전승된다고 할 수 있다. 부설과 묘화 부인의 사랑을 통한 구도의 길에서도 불법의 진리는 다 마음먹기에 달려 있음을 깨닫게 하는 재가성도담이라고 할 수 있다.
[채록/수집상황]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중계리에 있는 월명암에 「부설전」이 전한다. 내용의 기록은 전라북도 문화관광정보[http://www.gojb.net]의 전통문화 항목에 실려 있는데, 이는 김제시 문화관광과에서 제공한 정보이다.
[내용]
650년(백제 의자왕 10) 무렵 고현에 성은 구(具)씨요, 이름은 무원(無寃)이라는 불교 신자가 살고 있었다. 늦게야 딸 하나를 낳았으니 무남독녀라 금지옥엽이요, 이름은 묘화라 불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말을 못하는 천성의 벙어리였다. 이로 인하여 구씨 내외는 그를 몹시 한탄하였다.
이 이야기에서 전해지는 전설에는 이 소녀가 부처님 곁에 피었던 연꽃을 꺾은 죄 값으로 이승에 벙어리가 되어 추방되었다는 것이다. 묘화는 자랄수록 얼굴은 백옥 같고 자태는 부용[연꽃]같으며 부모에 대한 효심이 지극하여 인근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비록 말은 못하나 선녀같이 아름다운 묘화를 본 총각들은 앞을 다투어 청혼하였으나 묘화는 모두 거절하였다.
묘화의 나이 20세 되던 어느 봄날 먹장삼을 입고 배낭을 멘 수도스님 세 분이 탁발 걸음으로 이 마을에 당도하여 묘화의 집에 이르렀을 때 느닷없이 내리기 시작한 소나기로 스님들은 오도 가도 못하고 머물게 되었다. 그들이 바로 부설, 영희(靈熙), 영조(靈照)라는 수도자들이었다. 해가 저물었으나 비는 개지 않고 계속 내려 부득이 이곳 구무원의 신세를 지기로 하고 행장을 풀었다.
그날 밤 구무원의 집에는 큰 경사가 났다. 요조숙녀로 곱게 자라면서도 말을 못하던 묘화가 말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온 집안은 물론 마을 사람들도 이 소문을 듣고 모여 들어 입을 모아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묘화는 말하기를, “부설 스님과 소녀는 전생에도 인연이 있었고 금생에도 인연이 있으니 인과를 따를 것이 바로 불법이라 하겠습니다. 소녀 삼생연분을 이제야 만났으니 죽기를 맹세하고 부설 스님을 남편으로 섬기겠습니다.”라고 일장설화를 늘어놓았다.
그러자 구무원과 그 부인도 20년이란 세월을 말을 못하다가 하게 된 것도 기특하지만 부처님의 진리를 말하는 데는 입만 딱 벌리고 말을 하지 못했다. 더욱이 삼생연분을 만났으니 부도를 다하겠다는 묘화를 감히 말릴 수가 없었다. 부설 스님도 자작자수(自作自受)와 인(因)으로 하여금 과(果)가 따르는 법이며 자기를 만나기 위하여 생후 20년간 말을 안했던 묘화를 차마 뿌리칠 수 없어서 두 도반(道伴)을 작별하니 영희, 영조 두 스님은 오대산(五臺山) 문수도량(文殊道場)으로 공부를 하러 떠나고 부설 스님은 거사라 자칭하고 묘화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부설거사의 성은 진(陣)씨요 이름은 광세(光世)라 불국사 원부선사(圓浮禪師)에게 득도하니 법명이 부설이요 자는 의상(宜祥)이다. 부설거사와 묘화 부인은 1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등운(登雲)이요 딸은 월명(月明)이었다. 남매가 장성하자 거사는 병이 있다고 거짓 핑계를 대고 서해백강(西海白江) 변에 초려를 지으니 이곳이 망해(望海)이다. 이곳에서 석가세존의 ‘일좌부동경(一座不動經)’ 6년과 달마대사(達摩大師)의 9년 면벽을 본받아 심공을 잠수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옛날 친우인 영희, 영조 두 대사가 참례를 마치고 사능해안(社陵海岸) 망해를 찾아와 희롱적인 태도를 보이자 부설이 자리에서 일어나 말하기를, “우리 3인이 공부의 성숙을 시험하여 보자.”고 하였다. 낙수 병 3개를 처마에 높이 달고 세 명이 지팡이로 일시에 때리자 하니 두 대사가 이에 응낙하고 때렸는데 두 개 병은 깨어지면서 물이 쏟아져 버렸다. 그러나 부설거사가 때린 병은 깨어졌어도 물은 처마에 매달려 있었다.
또한 부설거사는 청천백일에 풍운조화를 부려 때 아닌 비비백설을 내리게 하였으나 일편의 눈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 신통한 도술을 부렸다고 한다. 거사가 두 대사에게 말하기를, 생사를 따라 윤회천류한 범부(凡夫)는 병이 깨지면서 쏟아진 것과 같이 진성이 본래 영명하야 항시 머물고 있는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병이 깨어져도 물은 공중에 매달린 것과 같다고 하였다. 이 광경을 보고 영희, 영조 두 대사는 부설 앞에 예배하고 견성(見性)하였음을 흠모하며 법설을 청하였다고 한다.
그 후 부설거사와 묘화 부인은 등운과 월명 두 자녀를 출가위승(出家爲僧)하게 하고 두 자녀를 위하여 지금의 부안에 있는 등운암과 월명암을 지었으니 부설과 묘화의 유적이라 하겠다.
[모티프 분석]
「부설거사와 묘화부인」의 주요 모티프는 ‘삼생연분을 만나 말을 하는 부부가 된 묘화’, ‘망해에서 도를 닦아 정진한 부설’ 등이다. 이는 불심이 강한 부설이 수도의 길을 가던 도중에 묘화를 만나 자비보살의 심정으로 속세에 머무르며 도를 닦았던 부설거사의 이야기로서, 반드시 속세를 벗어나야만 도의 경지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속세에 머물러도 도를 이룰 수 있음을 깨닫게 하는 재가성도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