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015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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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儀禮服 |
영어의미역 | Rite Costume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
집필자 | 김영자 |
[정의]
전라북도 김제 지역에서 의례를 거행할 때 입는 옷.
[개설]
의례복(儀禮服)은 의례 때 특별히 갖추는 의복으로 가장 큰 의례는 사례(四禮), 즉 관혼상제(冠婚喪祭)였다. 특히 혼례 때 일반가에서는 최상의 치레를 하게 되므로 이를 통해 우리나라 일반 서민의 의생활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관혼상제 의례복]
1. 관례복
관례(冠禮)란 남자는 관을 쓰고 여자는 비녀를 꽂아 어른이 되는 예식이다. 남자 성인식을 관례, 여자 성인식을 계례(筓禮)라고 하였다. 남자는 15~20세에, 여자는 15세에 관례를 치렀다. 남자는 어릴 때 입던 도령 복장을 벗은 후 상투를 틀고 초립이나 갓을 썼으며, 형편에 따라 심의(深衣)나 관복·도포를 입었다. 여자는 머리를 올리고 비녀를 꽂았으며 화관에 원삼을 입었다.
관례의 의식은 복잡할 뿐 아니라 삼가례(三加禮)에서 오는 복식의 부담으로 경제적인 여유가 있어야만 치를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문헌에 명시된 전형적인 의식을 따르는 것은 힘이 들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삼가의 절차를 일일이 밟지 않고 관의 경우는 망건·복건[幅巾]·초립(草笠) 등을 한꺼번에 거듭 씀으로써 삼가를 대신하였다. 옷은 단령포나 도포 또는 중치막·두루마기 등 있는 대로 편의에 따라 착용하는 것이 통례가 되었다. 관례를 올린 소년이 흑립(黑笠)을 쓰게 될 때까지 복건 위에 초립을 쓰고 다녔다 하여 초립동(草笠童)이란 호칭이 붙기도 하였다.
2. 혼례복
혼례복은 혼인할 때 입는 옷이다. 혼례는 가장 경사스럽게 여겨 혼례 당일만은 일반 서민들도 궁중 예복을 착용할 수 있게 허용하였다. 또한 양반과 평민의 구분도 없이 일생에 한번 최고의 호사 치레를 하였다. 신랑의 경우 속에는 평상복을 입었으나 겉에는 예복으로 관복인 남색 또는 북청색의 단령을 착용하고 벼슬과 품계에 따라 그에 맞는 흉배를 달았다. 고종 때에는 당상관과 똑같은 쌍학흉배(雙鶴胸背)를 달고 서대를 띠었으며 사모를 쓰고 목화(木靴)를 신었다.
신부의 예복은 속옷의 경우 평상복과 비슷한데 속치마로 무릎까지 닿는 두루치기 위에 무지기를 입고 밑단에 금박을 한 홍색 스란치마나 대란치마와 자주색 회장을 단 삼회장 노랑저고리를 입었다. 겉옷으로 원삼 또는 활옷을 입었으며, 머리는 어여머리를 하고 홍색 사에 금박을 넣은 큰 댕기를 늘였다. 칠보로 장식한 족두리나 화관을 썼으며, 신코에 구름무늬 수를 놓은 당혜(唐鞋)를 신었다.
3. 상례복
상중에 있는 상제(喪制)나 복인(服人)이 입는 예복이다. 가장 철저하고 까다로운 격식을 차린 의례가 상례였던 만큼 이때 갖추는 상복에는 격식이 많았다. 상복은 대개 거친 삼베로 만들며, 시접도 겉으로 드러나고 아랫단도 꿰매지 않았다.
남자의 상복은 관(冠)·효건(孝巾)·최의(衰衣)·상(裳)·중의(中衣)·행전(行纏)·수질(首絰)·요질(腰絰)·교대(絞帶)·장(扙)·짚신[履] 등으로 되어 있다. 최의는 거친 마포(麻布)로 만드는데, 소매는 넓고 가슴 왼편에는 최(縗)를 단다. 그 위에 앞 3폭 뒤 4폭으로 된 상을 입고 삼띠를 띠며 베로 만든 행전을 치고 굴건(屈巾)을 쓰고 상장(喪杖)을 짚는다. 상주가 외출할 때는 두루마기 위에 베로 된 심의(深衣)를 입고 베띠를 띠며 포망(布網)과 두건(頭巾) 위에 방립(方笠)을 쓰고 포선(布扇)을 든다.
여자의 상복으로는 남자의 상복과 마찬가지로 거친 마포로 만든 치마저고리에 대수장군(大袖長裙)을 입는다. 대수장군은 소매가 넓고 길은 앞에 여섯, 뒤에 여섯 개를 달고 등바대는 겉에 댄다. 허리에는 베띠와 삼띠를 띠고 종부(宗婦)나 기혼자는 대수장군에 흰색 족두리를 쓰고 짚신을 신는다. 미혼자는 중의를 입고 수질을 쓴다. 부친상에는 단을 휘감쳐서 만들고, 모친상에는 단을 안으로 한 번 꺾어 만든다.
4. 제례복
제례복은 제를 올릴 때 착용하는 복장이다. 조선 초기의 남자 제례복은 심의(深衣)[유학자들이 입던 법복]에 복건을 쓰는 것이었으나 임진왜란 이후부터는 흰색 도포를 입고 유건이나 흑립을 썼다. 여자는 제사에 직접 참여하지 않기 때문에 특별히 정해진 옷은 없었으며, 대개 소복을 입거나 흰색 또는 옥색 치마저고리를 깨끗이 빨아서 입었다.
[출생의례복]
출생의례복은 출생 직후부터 삼칠일·백일·돌까지 거치는 동안에 입는 의복이다. 삼칠일 옷은 출생 후 3일부터 21일 동안 입히는 옷이다. 주로 백일까지 간다. 백일 옷은 백색 옷감에 백 줄을 넣어 만든 누비옷이다. 이렇게 하면 100살까지 산다고 한다.
돌복은 아이가 태어난 지 1년 되는 돌날에 입는 옷이다. 남자아이는 연보라색 풍차바지에 옥색이나 분홍색 저고리를 입고 남색 돌띠를 매었다. 개화기 이후에는 그 위에 남색 조끼와 연두색 길에 색동소매를 단 마고자를 덧입었다. 형편에 따라 오방색으로 지은 까치두루마기를 입고 그 위에 전복을 입기도 하였다.
머리에는 검은 사로 만든 복건을 썼는데, 복건은 성인용과 같으나 금박을 하여 귀여움을 더해 주었다. 전복은 답호 또는 쾌자라고도 하는데, 등솔이 길게 트이고 소매가 없는 옷으로 깃이나 섶 등에 수복강녕(壽福康寧)이나 화문(花紋)을 금박하였다. 붉은 바탕에 십장생을 수놓은 남색 돌띠를 매었다. 이 돌띠의 등 부분에는 12개월을 상징하는 12개의 작은 염낭에 여러 종류의 곡식을 담아 매달아 주어 부귀영화를 염원하기도 하였다.
여자아이는 분홍색 풍차바지에 노란색 속치마를 입고 다홍치마를 입었다. 저고리는 색동 소매를 단 노랑이나 연두색 길의 저고리였다. 여기에 더 갖추어 입자면 어린이 당의를 입고 머리에 굴레를 쓰며 길상 문양의 패물로 만든 아기노리개를 달았다. 신은 남자아이는 태사혜(太史鞋), 여자아이는 꽃신 또는 비단신을 신었다.
[오늘날 의례복]
서구 문물이 들어오고 종교가 다양화되면서 우리의 의식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허례허식이라 칭하던 의례의 과정도 간소화하고 복장도 예만 갖추게 되었다. 또한 기독교·불교·천주교 등의 다양한 종교의 영향으로 의례복도 종교에 따라 달라졌다. 관례는 성균관이나 향교에서나 격을 갖추어 행하고 있다. 결혼식은 서구식으로 변해 신부는 웨딩드레스를, 신랑은 턱시도를 입는 것이 일반적이다. 상복도 간소화하여 상주는 검은색 정장을, 여자들은 검은색이나 흰색의 치마저고리를 입는다. 오늘날 제례 복장에는 제약이 없으며 단정한 단색의 옷을 입는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