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01327 |
---|---|
한자 | 甑山敎本部大法社 |
영어의미역 | Daebeopsa, Headquater of Jeungsangyo |
분야 | 종교/신종교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328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승대 |
성격 | 종교단체 |
---|---|
설립연도/일시 | 1950년대 |
설립자 | 이상호 |
[정의]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에 있는 증산교본부의 교단.
[변천]
증산교 대법사 교단의 창시자 이상호(李祥昊)는 1888(고종 25) 전라남도 해남에서 출생하여 1967년에 죽었다. 그는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고 만주·북경 등을 유랑하다가 28세에 증산교를 알게 되었다. 증산교의 창시자 강일순의 언동에 관한 구전을 수집하여 1926년 『증산천사공사기(甑山天師公事記)』를 썼고, 1929년에는 이것을 동생 이정립(李正立)과 함께 증보하고 의미 해석을 보태어 『대순전경(大巡典經)』 초판을 펴냈다.
이 책은 한자가 더러 섞인 국문체로 현장감이 살아 있는 소박한 이야기 투의 서술로 되어 있다. 교리에 의한 합리화에는 힘쓰지 않았다. 그 뒤 차경석·김형렬·이정립·고부인 등과 보천교(普天敎)·미륵불교·동화교(東華敎)·태을교(太乙敎) 등의 교단을 이합(離合)하다가, 8·15해방이 되자 이정립·최위석 등 145명을 모아서 대법사(大法社)를 조직하여 증산교운동을 전개했다.
1947년 최위석과 헤어져 다른 파를 만들고 증산교라고 이름 붙였다. 6·25전쟁 뒤 전라북도 김제에 본부를 정하고 1967년 죽을 때까지 증산교 교주로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한때 100여 개에 이르던 교단이 일제의 종교 탄압에 의해 해산되기도 하고, 지하화되었다가 해방 이후 새로이 흥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통성을 주장하는 많은 증산교단이 발흥하여 난맥을 이루었으며, 일부에서는 교단통합운동을 펴기도 했으나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해방 이후 이들은 증산교단통정원·증산대도회·동도교·증산종단친목회·증산종단협회·증산종단연합회 등의 이름으로 여러 차례 연합조직을 형성했으나 교파 통일에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1950년 후반에는 태극도에 의해 주도된 말세론적 신앙이 사회의 비난을 받았고, 1960년대에는 자체 정비와 도태과정을 겪는 한편, 이상호·이정립 형제에 의하여 경전 발행 작업이 진행되었다.
1970년대 이후 한국학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한국의 정신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다고 해서 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때 증산사상연구회가 주도하여 1975년부터 『증산사상연구』를 발간하기 시작했고, 1974년 증산도장이 대학가를 중심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주요사업과 업무]
현재 증산교로서 최대 종단인 대순진리회는 1972년부터 종단 3대 기본사업을 포덕·교화·수도로 정하고, 주요 사업을 구호 자선, 사회복지, 교육 사업 등으로 확대하고 있다.
[현황]
현재 50여 개의 교단이 난립되어 있고 주요 교단으로는 증산교본부·태극도·대순진리회·증산진법회·증산도 등이 있다. 1988년 12월 현재 1,515개소의 교당과 1만 2847명의 교직자, 120여 만 명의 교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