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012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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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一烈三孝旌閭 |
영어의미역 | Jeongryeo of Virtuous and Filial Duty of Icheon Seo Clan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성덕면 대석리 319-1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진돈 |
성격 | 정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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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 | 석정려 |
건립시기/일시 | 1904년(고종 41) |
정면칸수 | 1칸 |
측면칸수 | 1칸 |
소재지 주소 | 전라북도 김제시 성덕면 대석리 319-1 |
문화재 지정번호 | 지정되지 않음 |
문화재 지정일 | 지정되지 않음 |
[정의]
전라북도 김제시 성덕면 대석리에 있는 이천서씨 가문의 효열을 기리는 정려.
[개설]
서택진의 본관은 이천(利川), 자는 덕유이다. 절효공의 후예로서 증호조판서(贈戶曹判書) 서봉정(徐鳳廷)의 아들이다. 서택진은 12세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예절을 다하여 장례를 치렀다. 더 자라서는 어머니가 병으로 몸져눕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마시게 하였다. 어머니 또한 세상을 떠나자 장례를 치르고 3년 동안 무덤 곁에서 움막을 짓고 정성껏 돌보았다. 서택진의 아내 전주최씨도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시니 많은 사람들이 칭찬하기를 지아비나 지어미가 똑같다[是夫是婦]고 하였다.
서상삼의 자는 공심(恭心), 호는 야은관도사(野隱官都事)로, 증가선대부(贈嘉善大夫) 서택진의 아들이다. 서상삼은 부모를 극진히 봉양하였는데, 어머니가 병환으로 위급함에 처하자 단지수혈하여 연명케 했으며, 세상을 떠나자 여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였다. 이러한 효성을 임금께 아뢰자 임금이 벼슬과 이름을 적은 기를 내렸다.
[위치]
성덕면사무소에서 성동초등학교 방향으로 1.9㎞쯤 가면 대석사거리가 나오는데, 그 직전 왼쪽에 석비 4기가 있다. 대석리 마을회관 앞에 넓은 터를 만들어서 비를 일렬로 세워 놓았다. 석정려 4기를 세우고 그 뒤에는 붉은 벽돌로 담장을 둘렀다. 다른 곳에 있던 비까지 이곳으로 옮겨 놓고 정문도 새로 만들어 주위가 정돈되었다.
[변천]
일열삼효정려(一烈三孝旌閭)는 1904년(고종 41) 4월에 명정되었다. 1995년에 세운 중건기를 보면 처음에는 목조와가에 단청을 한 건물이었으나 풍화로 인하여 구정려를 철거하고 그 원비를 재건하여 보호하기 위하여 자손들이 상의하여 석정려로 개수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내용으로 보아 현재의 석정려는 1995년에 개수했음을 알 수 있다.
[형태]
석정려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돌기둥과 갓석을 사용하였고 안에는 오석으로 된 정려비가 있다. 갓석의 형태는 팔작지붕 모양이며 앞쪽과 뒤쪽 모두 연꽃 문양을 조각했다.
[현황]
일열삼효정려로 들어가는 담장 문에는 ‘열효정려(烈孝旌閭)’라는 액자가 붙어 있다. 비석의 내용을 왼쪽부터 살펴보면 ‘열녀증숭정대부이조판서겸판의금부사서봉정지처증정경부인경주김씨지려(烈女贈崇政大夫吏曹判書兼判義禁府事徐鳳廷之妻贈貞敬夫人慶州金氏之閭)’, ‘효자증숭정대부행동돈령서택진지려(孝子贈崇政大夫行同敦寧徐澤鎭之閭)’, ‘효부증숭정대부행동돈령서택진처증정경부인전주최씨지려(孝婦贈崇政大夫行同敦寧徐澤鎭妻贈貞敬夫人全州崔氏之閭)’, ‘효자행통훈대부의금부도사서공상삼지비 배효부숙인전주최씨지비(孝子行通訓大夫義禁府都事徐公相三之碑 配孝婦淑人全州崔氏之碑)’라고 쓰여 있다. 서상삼의 비석 연혁은 조형하가 글을 짓고 석촌 윤용구(尹用求)가 1922년 봄에 썼다.
[의의와 평가]
일열삼효정려는 조선 후기 전라북도 김제시 성덕면 대석리에 살았던 이천서씨 가문에서 3대에 걸쳐 열녀와 효자가 났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즉, 서택진의 어머니 경주김씨와 서택진 본인과 처, 그리고 아들 서상삼과 처의 효행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