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012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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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命瑞旌閭 |
영어의미역 | Jeongryeo for Choe Myeongseo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 용지리 364-1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진돈 |
성격 | 정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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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 | 팔작지붕 |
건립시기/일시 | 1862년 |
정면칸수 | 1칸 |
측면칸수 | 1칸 |
소재지 주소 |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 용지리 364-1 |
소유자 | 최병원 |
[정의]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 용지리에 있는 조선 후기 효자 최명서의 정려.
[개설]
최명서(崔命瑞)는 전주최씨 최군옥을 시조로 하고 만육 최양을 중시조로 하는 최여정 도사공파의 후손이다. 호는 낙촌으로 참봉 최응삼(崔應三)의 7세손이다. 전주최씨 도사공파는 금구면 둔산, 신흥, 광현, 용사, 용전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최명서는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여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부모님을 섬기는 도리를 잘 알고 실천하였다. 비록 집은 가난했으나 몸소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 부모님을 아무 부족함 없이 봉양하였을 뿐 아니라, 밖에 나가 혹 맛있는 음식이나 좋은 물건을 보면 반드시 구해 가지고 돌아와 부모님께 먼저 올리고 자기 입에 넣었다. 또한 먼 길을 떠날 때도 술병만은 꼭 차고 다니다가 돌아올 때는 반드시 아버지가 좋아하는 술을 사가지고 와서 올렸다.
아버지가 병으로 몸져눕자 최명서는 크게 걱정하며 먹지도 마시지도 않은 채 단을 쌓아 놓고 매일 밤낮으로 하늘에 자기가 대신 죽게 해 달라고 빌었다. 그러면서 때로는 변을 맛보고 때로는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리기까지 하였으나 아버지는 끝내 낫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에 최명서는 예로써 장례를 치른 후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했는데, 추운 겨울에도 상복 하나만 걸치고 울고 또 울어 무릎자리가 닿는 땅이 움푹 파일 지경이었다.
무덤이 있는 곳에는 샘이 없어 매일 먼 곳에서 물을 길어다가 제사에 쓰는데, 하루는 갑자기 움막 옆에서 샘물이 솟아났다. 그러나 그 샘 곁에 커다란 뱀이 똬리를 틀고 종일 피하지 않고 있어 꺼림칙하였으나 그날 밤 비바람이 불고 번개가 치더니 이튿날 뱀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얼마 후 어머니도 병환 끝에 세상을 떠났는데, 역시 모든 정성을 다하여서 제사 때에는 아무리 구하기 어려운 물건이라도 꼭 구해 와서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와 같이 정성을 다했다고 한다.
[위치]
금구면의 면사무소에서 김제 쪽으로 약 950m 가면 고속도로 톨게이트가 나오는데, 여기서 우회전하여 레미콘 공장 쪽으로 약 1.45㎞ 가면 나오는 광현마을 중앙에 최명서 정려가 위치해 있다.
[변천]
최명서 정려는 편액에 “상지 13년 임술 6월에 명정”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1862년(철종 13)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기둥에 물이 튕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슬레이트를 겹처마에 덧붙인 흔적이 있다. 근래 바닥에 풀이 나지 못하게 시멘트로 발랐다.
[형태]
정면 1칸, 측면 1칸의 팔작 기와지붕 건물로 사면이 홍살로 되어 있다. 정려 내부에 “효자학생최명서지려 상지십삼년임술 유월일 명정”이라고 써진 편액이 있다. 최명서 정려는 도사공파 6정려 중의 하나에 속한다.
[의의와 평가]
전주최씨 도사공파들이 김제 금구 지역에 살면서 효자와 열녀를 많이 배출하여 지역 교화에 크게 이바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