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012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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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福龍旌閭 |
영어의미역 | Jeongryeo of Yun Bokryong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월봉동 65-1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진돈 |
성격 | 정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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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 | 팔작지붕 |
건립시기/일시 | 1874년(고종 11) |
정면칸수 | 1칸 |
측면칸수 | 1칸 |
소재지 주소 | 전라북도 김제시 월봉동 65-1 |
[정의]
전라북도 김제시 월봉동에 있는 효자 윤복룡의 정려.
[개설]
파평 사람인 윤복룡(尹福龍)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가 병을 얻어 누웠을 때 방방곡곡에 수소문하여 약을 구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마시게 하는 등 병을 치료하기에 온 힘을 쏟았다. 그러나 끝내 부모가 돌아가시자 예를 다하여 장례를 치르고 3년 동안 무덤 곁에 움막을 짓고 모셨다. 그 후로도 3년 동안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는 어김없이 묘를 찾아가 돌보니 유림들의 제청으로 1874년(고종 11) 3월에 벼슬과 이름을 적은 기를 받았다.
[위치]
교동월촌동 주민센터에서 동쪽으로 난 길로 들어서서 월촌농협과 동진농조 월촌출장소를 지나 1.6㎞ 가면 김제역에서 월봉동으로 오는 월랑사거리가 나온다. 이 월랑사거리에서 오른쪽 길로 꺾어 300m쯤 가면 갈촌마을이고, 여기서 남쪽으로 650m쯤 더 가면 윤복룡 정려가 있는 김제시 월봉동 봉월마을이 나온다.
[변천]
윤복룡 정려는 1874년 3월에 명정되었고, 정려기는 1876년 통정대부절충장군용양위부호군전행승정원좌승지 복천(福川) 오현영(吳泫泳)이 발문을 지었으며, 정려 서문은 1876년 자헌대부공조판서겸지경연춘추관기사관오위도총부도총관 상당(上黨) 한돈원(韓敦源)이 지었다.
[형태]
윤복룡 정려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이며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홍살이 있다. 담장은 블록 벽돌로 쌓았고 들어가는 입구는 철문을 달았다. 그 안에 비와 편액이 있다.
[현황]
윤복룡 정려 중앙의 비석에는 ‘효자증통정대부윤복룡지려(孝子贈通政大夫尹福龍之閭)’라고 쓰여 있고, 바로 안에는 정려를 내린 편액과 정려기와 정려 서문을 적은 편액이 붙어 있다.
[의의와 평가]
효자 윤복룡은 동몽교관을 증직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정려비를 통해서는 통정대부를 증직받았음을 알 수 있다. 윤복룡은 부모 섬기기에 온 힘을 쏟아 타인의 모범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