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011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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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六松祠 |
영어의미역 | Yuksongsa Shrine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삼봉리 369[삼봉길 203-7]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용엽 |
성격 | 사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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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시기/일시 | 조선 후기 |
소재지 주소 |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삼봉리 369[삼봉길 203-7] |
[정의]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삼봉리에 있는 조선 후기 사당.
[개설]
육송사(六松祠)는 본래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삼봉리에 살고 있는 언양김씨(彦陽金氏)의 집안 사당으로 창건된 것이어서 육송사에 모셔져 있는 사람들은 모두 언양김씨이다. 당초 배향되었던 송씨 3형제[송정기(宋廷耆)·송정구(宋廷耈)·송정모(宋廷模)]가 제외되고, 현재는 묵제 김관(金瓘)[1425~1485]을 중심으로 용암 김승속(金承續)·구암 김승서(金承緖)·축영 김천서·찬촌 김인후가 모셔져 있다.
김관의 호는 묵재(黙齋), 시호는 공양으로 언양인이다. 정치가로 1447년(세종 29) 사마시에 급제하고 1451년(문종 1)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시애의 난에 도총부사의 종사관으로 출정하여 공을 세워 적개공신이 되었다. 언양군에 봉함을 받았고, 전라도관찰사·황해도관찰사를 거쳐 찬성에 이르렀다. 산수화도 잘 그렸다고 하나 남아 있는 그림이 별로 없다.
김승속의 호는 용암으로 언양인이다. 9살에 소학을 통하고 수신제가(修身齊家)의 도를 밝혔으며, 12살~13살에 성리학을 배워 사마시에 급제하였다. 효도와 우애를 겸하여 향린(鄕隣)이 흠모하고 사림이 추앙·존중하였다. 김승서의 호는 구암으로 언양인이다. 맏형 김승적을 따라 공부하여 성리학과 예를 전공하고 천거받아 예번시참봉이 되니 모두가 추앙·존중하였다.
송정기의 호는 죽계로 여산인이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인효하고 지조가 단결하였으며, 9살에 『소학(小學)』을 송독하여 선생을 놀라게 하였다. 부모가 병환에 있으면 병세를 살피기 위해 그 변을 맛보았으며 하늘에 기도하고, 부모상에는 형제가 모두 여묘하니 호랑이가 와서 지켜 주었다 한다. 묘 근방에 소나무를 심으니 울창하게 되어 세상에서 효송(孝松)이라 불렀다. 1797년(정조 21) 효로 정려를 받았다.
송정구의 호는 백재로, 송정기의 가운데 동생이다. 부모의 병환에 손가락을 찢어 피를 바쳤고 상을 당하여 여묘하며 소나무를 많이 심었는데, 어느 해 송충이 성하여 효송까지 만연하니 송정구의 형제가 각각 송충을 잡아 씹어 뱉으니 다시는 범하지 않았다 한다. 형을 엄부(嚴父)와 같이 섬기며 효로써 집안을 다스리고 예로써 가르치니 향인이 흠모하여 송정구와 그 형제를 사(祠)를 세워 육송사에 배향하였다. 정조 때 정려를 받았다.
송정모의 호는 송정으로, 송정기의 막내 동생이다. 나면서부터 성품이 순화하고 효우하며, 학문에 힘써 모든 일에 의리로써 대하여 가히 범할 수 없는 기상이 있었다. 송시열(宋時烈)[1607~1689]이 덕원으로 귀양 가게 됨에 항소하여 그 후로는 두문불출하고 과장에 나갈 뜻을 끊으니 향린의 감복으로 사림들이 사(祠)에 배향하였다.
[위치]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삼봉리 낙수동에서 금구 방면으로 약 500m쯤 가면 오른쪽에 거야마을이란 표지석이 서 있다. 이 길을 따라 850m 더 가면 거야마을인데 마을 동쪽 200m 지점에 육송사가 자리하고 있다.
[변천]
육송사는 숙종조에 창건되었다. 1868년 서원철폐령으로 인해 철거되었다가 1936년 재건되었다. 재건과 동시에 배향된 인물은 김관·김승속·김승서·김천서·김인후로 바뀌었으며, 원래 배향되었던 송씨 3형제는 제외되었다.
[현황]
현재 육송사에는 김관·김승속·김승서·김천서·김인후가 모셔져 있다. 육송사에는 김천서·김인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