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011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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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華東書院 |
영어음역 | Hwadong Seowon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장화동 617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이용엽 |
성격 | 서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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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시기/일시 | 1924년 |
소재지 주소 | 전라북도 김제시 장화동 617 |
[정의]
전라북도 김제시 장화동에 있는 일제강점기 서원.
[개설]
외암 정윤교(鄭允喬)[1733~1821]의 아버지 정천배(鄭天培)가 어떤 여인의 무고로 억울하게 죽었다. 이에 정윤교와 송고(松皐) 정윤준(鄭允俊), 정윤검(鄭允儉) 등 3형제는 오랫동안 원수를 갚고자 제청도 치우지 않고 상복을 입은 채 원수를 찾아다녔고, 16년 만에 원수를 갚은 뒤 탈상을 하고 상복도 벗었다. 그런 다음 3형제는 동헌에 나가 그간의 전말을 상세하게 밝히고 살인을 했으니 죄를 내려 달라고 했다.
이에 원이 치죄(治罪)는 해야겠으나 3형제를 모두 벌할 수 없다 하여 큰아들인 정윤교를 감옥에 가두자 두 동생이 옥문 앞에 꿇어앉아 함께 벌을 내려달라고 호소하였다. 그리하여 인근의 선비들이 탄원하여 얼마 후에 풀려났는데, 갑자기 장대 같은 비가 내려 오랜 가뭄에 시달리던 근동 사람들이 하늘이 감동하여 효자비를 내려준 것이라고 칭찬해 마지않았다.
그 후 정윤교와 그 형제들은 ‘진심성의(盡心誠意)’ 네 글자로 생활의 지표를 삼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고, 세상이 점차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단념하고 후진을 양성하는 데에 전력하였다. 뒤에 효행이 높이 평가되어 고종 때에 정려문을 세우게 하고 통정대부로 추증하였는데, 인근 고을 유림들이 3형제의 높은 학문과 효성을 기리기 위해 화동서원(華東書院)을 건립하고 배향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추모하고 있다.
[현황]
화동서원에서는 현재 정윤교를 주벽으로 하여 정윤준, 정윤검과 사성재 정인현(鄭寅鉉)[1868~1933]을 배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