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011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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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溝鄕校 |
영어음역 | Geumgu Hanggyo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 금구리 152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이용엽 |
성격 | 향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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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 | 명륜당 팔작지붕|대성전 맞배지붕|만화루 맞배지붕 |
건립시기/일시 | 1390년(공양왕 2) |
정면칸수 | 명륜당 5칸|대성전 3칸|만화루 3칸 |
측면칸수 | 명륜당 3칸|대성전 2칸|만화루 2칸 |
소재지 주소 |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 금구리 152 |
문화재 지정번호 |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13호 |
문화재 지정일 | 1984년 4월 1일 |
[정의]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 금구리에 있는 고려 후기 향교.
[위치]
금구향교(金溝鄕校) 창건 당시는 금구동헌에서 동쪽으로 2㎞ 떨어진 곳에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되었다. 서혈산(西血山) 아래에 중건하였으나 지세가 좋지 못하여 1676년(숙종 2)에 지금의 위치인 금구면 금구리 152번지로 옮겨 중건하였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금구향교가 세 번째 옮겨 지금 자리에 왔다고 하며 전에 있던 자리는 동산 뒤에 있었는데, 대제 날마다 호랑이가 직원을 습격하여 현 위치로 옮긴 것이라 한다.
[변천]
금구향교는 1390년(공양왕 2)에 창건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1676년 중건하였다. 금구향교가 지어진 지 오래되어 건물이 낡았으나 고칠 능력과 방안이 없어 향교 뜰에 있던 수백 년 된 은행나무를 베어 팔아서 보수 비용을 마련하였다고 한다. 지금 대전 앞뜰에 서 있는 은행나무는 그때 새로 심은 것이라 한다.
6·25전쟁 중에는 한때 임시 면청사로 사용되는 등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그 후 유학을 공부하는 이들이 나서서 1954년 3월 향학열에 불타는 청소년들을 모아 향교 공민학교를 설립하여 문을 열었다. 1422년(세종 4)에 건립된 만화루는 1974년 보수하고 1976년 단청을 새로 입혔다.
[형태]
금구향교는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식 건물 배치로, 이층 누각(樓閣) 형식인 만화루를 지나면 앞쪽에 강학기관인 명륜당이 있고 뒤쪽에 향사기관인 대성전이 위치하며, 양 옆으로 동재와 서재가 자리하고 있다.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고,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처마는 겹처마, 기둥은 두리기둥, 주초는 자연석 덤벙주초로 기단을 약간 다듬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1단으로 쌓았다.
[현황]
대성전에는 공자를 중심으로 4성 송대 6현 우리나라 18현을 배향하고 있다. 공자를 중심으로 중국의 4성인 안자(顔子)·증자(曾子)·자사(子思)·맹자(孟子)와 송조 6현 주돈이(周敦頤)·정명도(程明道)·정이천(程伊川)·소강절(邵康節)·장횡거(張橫渠)·주희(朱熹)를 배향하고 있다.
동·서벽에는 국내의 18현인 설총(薛聰)·안향(安珦)·김굉필(金宏弼)·조광조(趙光祖)·이황(李滉)·이이(李珥)·김장생(金長生)·김집(金集)·송준길(宋浚吉)·최치원(崔致遠)·정몽주(鄭夢周)·정여창(鄭汝昌)·이언적(李彦迪)·김인후(金麟厚)·성혼(成渾)·조헌(趙憲)·송시열(宋時烈)·박세채(朴世采)를 배향하였다.
금구향교는 1984년 4월 1일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13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서재는 한문과 서예 등을 지도하는 일요학교 강의실로 사용되고 있다. 금구향교 유지 및 관리는 뜻 있는 유림들이 정해진 금액을 모아 모성계를 조직하여 봄가을로 제사를 모시고 있으며, 건물 보수도 그들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