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011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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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忠臣 |
영어의미역 | Faithful Retainer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김진돈 |
[정의]
전라북도 김제 지역에 연고를 두고 국가나 왕을 위해 충성을 다한 인물.
[개설]
유교를 국시를 삼은 조선시대에서는 행동 강령의 가장 기본이 되는 삼강(三剛), 특히 군신과 부자와 부부 관계의 도리를 역설하였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충(忠)·효(孝)·열(烈)을 장려하고 두드러진 행적이 있는 사람은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올려 백성들의 사표로 삼았으며, 또 정려를 내려서 마을 입구에 정려각을 짓게 하고 사람들의 본이 되도록 하였다.
조선 후기로 오면서 정려를 내려 달라는 추천장이 많아졌는데, 그 절차가 상당히 복잡하였다. 먼저 해당 고을의 향교에서 초안을 잡아 그 고을의 유림이 서명하는데, 예를 들면 호남에서는 전주와 남원, 광주, 나주 등 네 곳의 장관 통문을 받아서 이를 예조에 올려 보내면, 예조에서는 직접 국왕에게 주달하여 정려를 내리느냐 마느냐를 결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으로 인해 김제 지역에는 많은 충신이 있었으나 이름 없이 민초로 사라진 사람이 너무나 많았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호남 사람들이다. 특히 김제 지역의 경우 곡창 지대를 지키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전쟁에 참여하여 목숨을 잃었지만, 이렇듯 까다로운 절차로 인해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야 했던 것이다.
[김제 지역 충신 현황]
『김제향교지』 ‘충훈’ 편에 나오는 충신은 모두 71명으로 다음과 같다.
“조의(趙義), 조숭지(趙崇智), 조수량, 정임, 조원우, 박거겸(朴居謙), 조원론, 오사영, 조거, 안득, 박위겸, 오선겸, 박충길, 조영립(趙英立), 안징, 조종길, 조종위, 박석정, 황장손, 정소, 황박(黃璞), 이경주, 박정영, 김경로, 이유, 박충일, 이몽상(李夢詳), 정식, 유현무, 유영성, 이시형, 백광언, 백사무, 유영걸, 유희현, 강중호(姜仲虎), 유희무, 안흥선, 유경만, 박명수, 윤찬(尹瓚), 윤여임(尹汝任), 강종현, 유여정, 유여굉, 유여령, 나팔기(羅八紀), 백선남, 마지룡(馬之龍), 유태형, 고봉익(高鳳翼), 정산용, 나신도(羅伸道), 고몽린, 박준, 박수번, 나치도, 조억령, 조억희, 조덕후, 조극랍, 조시준(趙時俊), 조종윤, 김정희, 유지정, 박정, 김영, 장춘원, 강채형, 조욱현, 온승민.”
의거는 동래인으로 ‘정희조’ 한 사람의 이름이 들어 있다. 그런데 조필달(趙必達)[1600~1664]의 경우 『김제향교지』 ‘충훈’ 편에는 이름이 없으나 김제 지역에 묘소와 신도비가 있다. 조필달은 정묘호란 때 세자를 호위했고, 병자호란 때에는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호위하였다. 또한 효종 때에는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북벌에 참여하여 삼도수군통제사겸경상우도수군절도사에 올랐다. 이와 같이 김제 지역은 어느 지역 못지않게 아주 많은 충신과 의사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금구향교지』에는 ‘충훈’ 편이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으나 금구 지역 출신으로 유명한 사람이 개항기에 순국한 장태수(張泰秀)이다. 장태수는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양산군수와 병조참의 등을 역임하였으나 1910년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자 식음을 전폐하고 절명하였다.
독립운동가 장현식(張鉉植)은 당시 금구면 상신리 서도마을에서 출생하였는데, 침체된 민족의 기운을 교육을 통해 부흥하기 위해 중앙고등보통학교[지금의 중앙고등학교]가 설립될 당시 거액을 기부하였다. 또한 1919년에 창설된 비밀결사 대동단의 운영자금을 제공하고, 『대동신문(大同新聞)』의 재정을 담당하다 발각되어 1921년 4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과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았다. 이후 조선어학회에도 자금을 조달하다 발각되어 재판을 받고 4년간에 걸쳐 옥고를 치르다 8·15해방과 함께 출옥하였다.
이외에도 김제 지역에서는 항일 독립군 이종희(李鍾熙), 독립지사 송시용(宋始鏞)을 비롯하여 많은 애국지사들이 태어났다. 김제시 금산면 원평리에 있는 옛 원평장터에는 김제 지역 3·1운동을 기념하기 위한 ‘기미독립만세운동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또한 금산사 상가 도로변에는 ‘애국지사정화암선생사적비’와 ‘애국지사육탄삼용사고안영권하사전공기념비’[6·25전공자] 등이 세워져 김제 지역의 의기를 널리 알리고 있다.
『만경향교지』 ‘충훈’ 편에는 “유경, 유복룡, 유현무, 유희현, 유희철, 유열걸, 유영무, 유영성, 유경만, 유지호, 유희무, 오대립, 오대익(吳大益), 오대진, 오기현, 이기(李沂), 함태영(咸台永), 곽경렬(郭京烈), 곽택, 서정천(徐廷天)” 등 20명의 이름이 들어 있다.
[충신 정려각 현황]
『김제·금구·만경향교지』에 기록되어 있는 충신들의 이름은 굉장히 많으나 현재 김제 지역에는 충신 정려각이 8개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다. 이것은 아마도 이들이 대부분 충신 정려기를 받았으나 현재는 정려각이 없어졌거나 경제적인 형편상 세우지 못한 경우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김제 지역에 남아 있는 충신 정려각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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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의 충신정려
[의의와 평가]
김제 지역 충신은 나라가 절대 절명의 위기에 처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대거 나타나고 있으며, 이후 일제강점기에도 많은 의병들이 활약했음을 알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이 “만약 호남이 없었다면 국가도 없을 것이다(若無湖南, 是無國家)”라고 했듯이, 김제 지역에서와 같이 선비와 여러 민초들의 나라를 지키려는 충의 정신이 강했기 때문에 나라가 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누란에 처한 나라를 지키기 위해 불같이 일어난 김제와 만경 지역 충신들의 행적은 김제시의 정신문화를 조명하는 하나의 중요한 문화적 코드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