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0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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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濟述 |
영어음역 | Yun Jesul |
이칭/별칭 | 운재(芸齋)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백산면 석교리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채수환 |
성격 | 교육자|정치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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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전라북도 김제시 백산면 석교리 |
성별 | 남 |
생년 | 1904년 |
몰년 | 1986년 |
본관 | 파평 |
대표경력 | 국회부의장 |
[정의]
전라북도 김제시 출신의 교육자이자 정치가.
[개설]
윤제술(尹濟述)의 본관은 파평(坡平), 호는 운재(芸齋)이다. 1904년 전라북도 김제시 백산면 석교리 앙청에서 태어났다. ‘일이관지(一以貫之)’와 ‘유성(惟誠)’ 등 자신이 좋아하는 글귀처럼 6선의 오랜 의정활동에서도 문교위원으로만 일관했고, 철저한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 몰두해 온 지조로 일생을 바쳤다.
[활동사항]
윤제술은 7세 무렵 동네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웠는데, 신동이라 할 정도로 똑똑하였다. 글뿐만이 아니라 글씨도 잘 써서 신필이라고 소문이 났다. 9세 때 전주로 나가 심농(心農) 조기석(趙沂錫)에게서 2년 동안 서예를 사사 받았으며, 이때 성가(成家)하여 훗날 멀리 대만과 일본 등지에서까지 이름을 날렸다. 14세 때인 1918년 결혼하였는데, 전라북도 지방이 낳은 서예의 대가 강암(剛庵) 송성용(宋成鏞)이 4촌 처남이 된다. 이후 윤제술은 처숙인 송기면(宋基冕)이 문필가로 이름난 큰 선비였기에 그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히게 되었다. 이때 운재라는 호를 받았다.
1919년 당시 계화도에 칩거하고 있던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를 하다가 3·1운동을 겪으면서 개화의 물결을 접하게 되었다. 1925년 서울로 올라가 중동학교에 입학하여 1년 만에 수료하고 동경고등사범학교 영문과에 들어갔다. 동경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아카다현의 중학교에서 잠시 교사로 근무하다 귀국하여 모교인 중동학교에서 10년간 영어선생으로 재직하였다.
1939년 윤제술은 중동학교에서 보성학교로 옮긴 뒤 3년여 동안 근무하다가 1942년 성남학교로 옮겼는데, 일제가 영어 과목 폐지를 종용하자 강력히 항의하다 1944년에 사표를 내게 된다. 1946년 당시 화성학원 이사장직을 맡고 있던 이춘기가 전라북도 익산시 신동에 남성고등학교를 세우자 초대 교장으로 부임하였다. 이후 8년 동안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남성고등학교를 호남의 명문 고등학교 반열에 올려놓았다.
1954년 남성고등학교 교장직을 퇴임하고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김제 을구에서 당선되었다. 때마침 광활면의 방조제가 터지자, 농림분과를 택하여 방조제 공사를 위한 예산을 따내는 등 방조제 문제를 해결한 뒤 문교분과로 옮겼다. 1956년 민주당에 입당하였고,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재선하였다.
1960년 7월 29일 개정 헌법에 따라 민의원 선거가 치러지자 민주당 공천을 받아 김제 을구에서 세 번째로 제5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김제의 갑구와 을구가 합쳐지자 서울 서대문구로 지역구를 옮겨 당선되었다. 이어서 제7대와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당선되었다. 제7대 때에는 국회부의장에 선출되었다. 1973년에 선출된 통일당 최고위원직을 마지막으로 정계에서 은퇴하여 지난날 교편생활에서 익혀온 서예 수도로 만년을 보내면서도 그때그때 한국 민주정치 발전에 긴요한 원로의 발언을 거듭하기도 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 『운재선집(芸齋選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