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009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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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洪燮 |
영어음역 | Gim Hongseop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원평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채수환 |
성격 | 법조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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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원평리 |
성별 | 남 |
생년 | 1915년 |
몰년 | 1965년 |
대표경력 | 대법원 판사 |
[정의]
전라북도 김제시 출신의 법조인.
[개설]
김홍섭(金洪燮)은 1915년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원평리에서 태어나 1965년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죄수들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으로 인해 ‘수인(囚人)들의 아버지’, ‘법의 속에 성의(聖衣)를 입은 사람’, ‘사도법관(使徒法官)’ 등의 칭호를 얻었다.
[활동사항]
김홍섭은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할아버지에게서 한학을 배웠다. 20세가 되던 1935년 전주로 가서 일본인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독학으로 법률 공부를 시작했다. 이후 1939년에 니혼대학[日本大學]에 입학하여 2년 만에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하였다.
귀국 후 김홍섭은 김병로(金炳魯)와 함께 변호사 사무실을 차리고 활동하다가 광복이 되자 서울지방검찰청 검사로 임용되었다. 1946년 조선정판사 위조지폐사건을 담당하여 명성을 떨쳤으나, 그 해 9월 검사직에 회의를 느껴 사임하고 뚝섬에서 농사를 지었다. 그 뒤 당시 대법원장이던 김병로의 간청으로 법조계에 복귀하여 서울지방법원 판사·서울고등법원 판사·지방법원장·대법원 판사 등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1953년 9월 가족과 함께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김홍섭은 언제나 사람이 과연 사람을 재판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문제로 회의에 빠졌다고 한다. 사형제도 폐지를 주장하였으나 현실의 법에 따라야 했기 때문에 법을 집행하면서 사형수의 대부가 되어 뒷바라지를 하였다. 또한 사형이나 중형에 처해야 할 사건을 배당 받으면 교도소로 피고인을 찾아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접촉한 피고인들 중에 교화되지 않은 이가 없었다고 한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 『무명』·『창세기초』·『무상(無常)을 넘어서』 등이 있다. 유작인 『무상을 넘어서』에서는 인간이 인간을 재판하는 문제에 대해 언급하며, “모든 형사 피고인에게 있어서 그들의 인격과 과거 생활을 고려하지 않고 공소장 게재 사실만으로 그의 이전의 운명과 무관하게 처결해 낼 수 있을까…… 단(壇) 위에 앉아 피고인을 내려다보는 재판관의 심상(心象)은 과연 안온하고 자신에 찬 것일까……. 과연 인간이 인간을 재판할 수 있을까.”라고 쓰고 있다.
[상훈과 추모]
1972년에 율곡법률문화상이 추서되었다. 1995년 『동아일보』가 근대 사법 1백주년을 맞아 법관 357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응답 법관들은, 가장 존경하는 선배 법관으로 초대 김병로(金炳魯) 대법원장과 진지한 직무수행으로 유명했던 전 서울고법원장 김홍섭 판사를 선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