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008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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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瀚朝 |
영어음역 | Jeong Hanjo |
이칭/별칭 | 하몽(何夢)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백산면 상정리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채수환 |
성격 | 교육자|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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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전라북도 김제시 백산면 상정리 |
성별 | 남 |
생년 | 1890년 |
몰년 | 1945년 |
본관 | 동래 |
[정의]
일제강점기 전라북도 김제 출신의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
[활동사항]
정한조(鄭瀚朝)는 1890년 전라북도 김제시 백산면 상정리 요교마을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거유 석정 이정직(李定稷)의 문하에 들어가, 뛰어난 향학열로 18세에 사서삼경을 통달하였다. 구(舊) 학문만을 배울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명을 배워서 나라의 동량이 되어야 한다는 이정직의 가르침을 받고 서울로 올라와, 경성공업전수학원에 입학하여 신진 학문을 닦았다. 이후 1918년 충청남도 공주에 있는 공업실업학교 교원으로 재직하면서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행동으로 또는 말로 학생들에게 배일사상을 고취하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 박상진, 장현식, 채기중, 박재홍 등과 공주를 기반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된 뒤 형을 받고 공주형무소에서 3년을 복역하였다. 그 뒤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로 이사한 뒤 『조선일보』 삼례지국을 운영하면서 동지를 규합하는 한편 청년회와 신간회를 조직하였다. 또한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조합장이 되어 노동자의 권익 보장을 위해 활동하였다.
1931년 만보산사건이 발발할 당시 삼례에서 1차로 투쟁의 전위대로서 들고 나섰다. 이 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3년 동안 옥고를 치르고 나왔다. 이후 어디를 가나 일본 형사들의 감시로 행동에 구애를 받게 되자 이리[지금의 익산시]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정한조는 이리에서 『조선일보』 이리지국을 경영하며 각계의 동지들을 비밀리에 규합하는 한편 『조선일보』 지면을 통하여 일반 대중들을 계몽 격려하였고, 나아가 재만동포옹호위원회 위원장과 청년회장직을 맡으면서 활동을 하였다. 이렇게 되자 일본 경찰에서는 정한조를 호남지구 사상관찰소 제1호 요시찰 인물로 지정하고 항시 연금 상태로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또한 수시로 소환하여 고문하고, 예비 접속이란 명목으로 날마다 호된 곤욕을 주었다. 이로 인해 몸은 허약해졌고 정신적으로도 심한 고통을 받았으나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독립운동에 몸을 바쳐 활동하던 중 1945년 4월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상훈과 추모]
197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