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008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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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羅徽素 |
영어음역 | Na Hwiso |
이칭/별칭 | 월암(月庵)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신월동|용지면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채수환 |
성격 | 농업 개척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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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전라북도 김제시 신월동 |
성별 | 남 |
생년 | 1741년 |
몰년 | 1809년 |
본관 | 나주 |
[정의]
조선 후기 김제 출신의 농업 개척자.
[가계]
본관은 나주(羅州). 호는 월암(月庵). 아버지는 나창일(羅昌一)이다.
[활동사항]
나휘소(羅徽素)는 1741년 김제군 읍내면[현재의 김제시 신월동]에서 태어났다. 벽골제 내에 위치한 표박평(瓢朴坪)은 남쪽으로는 정읍시 감곡면 삼평리, 동쪽으로는 봉남면과 황산면, 북쪽으로는 김제시에 접하는 넓은 평야지만 용배수 시설이 전혀 되어 있지 않던 시절, 조금만 비가 내려도 원평천(院坪川)이 흘러넘쳐 광활한 대지가 금세 물바다로 변해 버렸다.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자 농사를 짓고자 하는 농민들이 없어 결국 표박평은 갈대밭으로 변해 갔다.
이러한 광경을 보아오던 나휘소는 사재를 털어서 1784년(정조 8)부터 1787년(정조 11)에 이르는 4년여에 걸쳐 표박평에 용배수로 공사를 완성하였는데, 기록에 의하면 너비와 깊이가 약 18㎝이고, 길이가 약 1,454m에 달하였다고 한다. 이후 황폐화되었던 광야는 아무리 많은 비가 내려도 침수 없는 옥답으로 변하여 해마다 풍작을 이루게 되었다. 1797년(정조 21)에는 이러한 사실이 조정에도 알려졌다고 한다.
[상훈과 추모]
월촌동을 비롯하여 전기리, 월랑리, 반월리 등 표박평 인근 네 개 마을 대표 31명이 나휘소의 공을 오래도록 기념하고 추모하기 위해 1828년(순조 27) 월산면 신야계를 창설하였고, 1832년에는 공적비를 세워 추모하였다.
[묘소]
묘소는 전라북도 김제시 용지면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