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008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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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杜起文 |
영어음역 | Du Gimun |
이칭/별칭 | 일송(逸松)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 |
시대 | 근대 |
집필자 | 채수환 |
성격 | 무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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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 |
성별 | 남 |
본관 | 두릉(杜陵) |
대표관직 | 병사(兵使) |
[정의]
조선 전기 김제 출신의 무신.
[개설]
금산의 웅치전투는 임진왜란 당시 관군과 의병이 호남을 지키기 위해 혈투를 전개한 싸움이다. 왜군이 충청도 영동의 황간 순양을 거쳐 1592년 6월 22일(음) 제원 천내강의 저곡나루로 금산성을 공격하여 오자 금산군수 권종이 저곡산성을 의지하여 왜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전사하였다. 이어서 6월 23일 금산성이 함락되고 이곳을 근거지로 하여 6월 말 용담과 진안을 거쳐 전주로 공격해 가는 과정에서 7월 8일 진안에서 전주로 가는 길목인 웅치[곰티재] 일대에서 의병장 황박, 나주판관 이복남, 김제군수 정담 등이 이끄는 관군과 의병이 호남을 지키기 위해 혈투를 벌였다.
웅치전투에서 호남 수비군의 사투로 왜군 전력을 크게 약화시켜 호남 방어의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다. 전투의 현장은 웅치를 경계로 한 지금의 진안군과 완주군 일대에 걸쳐 있었다. 웅치를 넘은 왜군은 전주 안덕원 부근까지 침입해 들어가 웅치에서 싸우다 퇴각한 나주판관 이복남, 의병장 황박의 군사와 대치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웅치를 넘는 과정에서 호남 수비군의 사투에 의하여 전력이 크게 약화된 상태였으며, 전주부성에서는 전라감사 이광과 이정란이 수비 태세를 강화하고 있어서 전주부성을 공격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7월 10일 전라감사 이광의 명령에 따라 남원에서 이동해 온 동복현감 황진이 안덕원 너머 소양평에서 이들을 물리침으로써 전주가 지켜지고 전라도가 극도의 위기 상황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웅치전투 이후 호남 여러 군현에서 동원된 관군과 의병이 금산성으로 퇴각한 왜군을 대대적으로 공격하기 위해 금산 주위에 주둔하며 공방전을 벌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금산의 왜군은 동복현감 황진과 광주목사 권율이 지키고 있던 이치를 향하여 공격하여 왔다. 이치전투가 벌어졌던 시기는 정확히 전하지 않으나 7월 20일 이후로 추정되는데, 오희문(吳希文)의 『쇄미록(鎖尾錄)』에는 8월 17일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싸움에서 황진의 분전과 권율의 독전으로 왜군을 물리치고 호남을 지키는 또 하나의 계기를 만들었다.
[가계]
본관은 두릉(杜陵).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두경승(杜景升)의 후손으로, 오위도총부도총관을 역임한 두양필(杜良弼)의 조카이다.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에서 공을 세운 두경문(杜慶文)이 형이다.
[활동사항]
두기문(杜起文)은 지금의 김제시 금구면에서 태어났다. 무과에 급제하여 병사(兵使)를 지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권율(權慄) 장군의 휘하에 들어가 왜적과 싸웠으며, 웅치전투와 이치전투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과를 올리는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국왕을 호종하여 남한산성에 이르렀다.
[상훈과 추모]
위성원종공신(衛聖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