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008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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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成立 |
영어음역 | Jo Seongrip |
이칭/별칭 | 사응(士凝),죽암(竹庵)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채수환 |
[정의]
조선 전기 김제 출신의 의병.
[가계]
본관은 김제(金堤). 자는 사응(士凝), 호는 죽암(竹庵)이다.
[활동사항]
조성립(趙成立)은 전라북도 김제에서 태어났으며, 1591년(선조 24)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왜병들이 전주를 공략하기 위하여 금산을 함락시키고 두 갈래로 나누어 그 중 한 왜병의 부대가 용담과 진안을 친 다음 진안과 경계를 이르는 전주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웅치를 넘어 전주로 진격하려 하였다. 이에 전라도도절제사(全羅道都節制使)로 임명되었던 권율(權慄) 장군은 김제군수 정담(鄭湛), 나주판관 이복남(李福男), 의병장 황박(黃璞) 등의 장수들에게 웅치를 방어하도록 하였다.
이 웅치 전투는 이복남, 황박, 정담, 남해현감 변응정(邊應井) 등이 1592년 7월 8일 군대를 연합하여 웅치에서 왜군과 싸운 전투로, 이때 조성립은 김제군수 정담을 좇아 웅치 전투에 출전하여 군량미를 운송하는 책임을 맡고 활약하였다. 왜군과 맞선 연합 군대는 결사적으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해지자 이복남은 퇴각하고, 정담과 변응정은 화살이 다 떨어질 때까지 용전하여 적병 수백 명을 죽였다. 그러나 김제군수 정담이 전사하자 용만(龍灣)의 행재소로 달려가 전공순절의 실상을 진소(陳疏)하니 선조가 상을 내렸다.
이후 조성립은 유즙(柳楫), 나치도(羅致道) 등과 함께 군량미를 모아 충성하려 하였으나 난이 평정되자 의곡(義穀)을 모두 관에 납부하였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 조성립의 노력과 업적을 장계(狀啓)하여 참봉(參奉)과 교관(敎官)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