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008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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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吳士英 |
영어음역 | O Sayeo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채수환 |
[정의]
조선 후기 문신이자 의병.
[개설]
정묘호란은 1627년(인조 5) 후금(後金)이 조선을 침입하여 일어난 전쟁을 말한다.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의 친명배금(親明排金) 정책과 후금 태종의 조선에 대한 주전정책(主戰政策)이 충돌하면서 발생하였다. 인조 즉위 후 집권 세력인 서인은 광해군 때의 대외 정책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후금과의 관계를 끊는 한편, 친명배금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에 후금은 배후로부터 위협을 받게 되고 조선과의 경제 교류가 막히면서 극심한 물자 부족이 발생하자 무력으로 이를 타개할 기회를 노렸다.
한편 인조반정의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불만은 품은 이괄(李适)의 난이 실패한 후 그 잔당이 후금으로 도망하여 광해군 폐위와 인조 즉위의 부당성을 호소하고 조선의 병력이 약함을 강조하면서 정벌할 것을 종용하였다. 이에 태종이 침략의 뜻을 굳혀 1627년 아민(阿敏)으로 하여금 3만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하게 하면서 정묘호란이 일어났다.
[가계]
본관은 보성(寶城). 자는 화여(華汝), 호는 안락재(安樂齋).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오천복(吳天福)의 후손으로, 판서(判書)를 역임한 오점(吳漸)의 현손이다.
[활동사항]
오사영(吳士英)은 기축옥사(己丑獄死)의 주인공이었던 정여립(鄭汝立)과 인척 사이였으나, 일찍이 그의 사람됨이 흉험(凶險)함을 알고 절교했을 만큼 선견지명이 있었다. 뒤에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참봉(參奉)에 임명되었다.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종질인 참봉 오선겸(吳善謙), 교관(敎官) 오수균(吳秀筠) 등과 더불어 군량을 모아 가동(家僮)을 거느리고 용화산(龍華山)에 이르렀으나 이미 난이 평정된 뒤인 탓에 귀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