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008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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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圓明海圓 |
영어음역 | Wonmyeonghaewon |
이칭/별칭 | 원명(圓明) |
분야 | 종교/불교,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이창섭 |
[정의]
고려 후기 전라북도 김제 지역 금산사에서 출가한 승려.
[개설]
1262년(원종 3) 완산주 함열군에서 태어나 1330년(충숙왕 17) 입적하였다. 주로 원나라에서 활동했던 유가종(瑜伽宗) 승려이다.
[가계]
속성은 조(趙)씨로, 아버지는 검교감문위대호군(檢校監門衛大護軍) 조혁(趙奕)이고, 어머니는 완산군부인(完山郡夫人) 이씨(李氏)이다.
[활동사항]
원명해원(圓明海圓)[1262~1330]은 12세에 금산사(金山寺)의 대사(大師) 석굉(釋宏)에게 나아가 머리를 깎고 그의 학문을 배웠다. 1294년(충렬왕 20) 봄에 승과에 급제하였고, 불주사(佛住寺)의 주지가 되었다. 1305년(충렬왕 31)에 원나라의 안서왕(安西王) 아난달(阿難達)이 고려 승려의 계행(戒行)이 매우 높다는 말을 듣고 사신을 파견해서 초청해 오자고 황제인 성종(成宗)에게 청하였는데, 원명해원이 그 명에 응하여 안서왕을 따라 북방으로 갔다. 이곳에서는 농경 대신 목축을 생업으로 삼아서 식사로는 고기를 먹었는데 원명해원은 고기를 입에 대지 않고 계율을 지켜서 왕이 그를 더욱 귀중하게 여겼다.
1307년(충렬왕 33)에 원나라 황제 무종(武宗)의 유지를 받들어 도제를 거느리고 국록을 받았으며, 가을과 봄에 정기적으로 천자가 순수(巡狩)할 때에는 황제의 명령으로 어가를 호종하였다. 무종의 뒤를 이은 인종(仁宗)이 무종 때부터 건립하던 숭은복원사(崇恩福元寺)를 1312년(충선왕 4)에 준공하자 원명해원을 첫 번째 주지로 삼았다. 이후 1328년(충숙왕 15)에 충숙왕이 금산사에 주지할 것을 청하며 혜감원명편조무애국일대사(慧鑑圓明遍照無礙國一大師)의 호를 내리고 중대광(重大匡) 우세군(祐世君)에 봉하였다. 이에 귀국하여 금산사에 머물며 절을 중창하였고,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은 1330년 2월 28일에 원나라 숭은복원사에서 입적하였다. 제자로는 현인(玄印)을 비롯한 30여 명이 있었다.
[학문과 사상]
유식학(唯識學)의 대의에 통달하였다.
[상훈과 추모]
원나라 문종(文宗) 황제 초에 황제의 총애를 받아 저폐(楮幣) 2만5천 관(貫)을 받았다. 1344년(충목왕 즉위년) 가을에 그의 법통을 이은 현인(玄印) 등 30여 인이 그의 부도(浮圖)와 비석을 만들고, 이곡에게 요청하여 비문을 요청하였다. 그 비문이 『가정집(稼亭集)』과 『동문선(東文選)』에 전한다.